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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Jul 24. 2022

'오늘의 망상'을 기록하며

오늘의 밥값 32 / 확실히 나, 가벼워졌다


요즘 나는 '오늘의 망상'이라는 카테고리로 메모를 적고 있다. 그것은 꽤 효과적이다.

가령, 어제 적은 메모는 "제주에 가서 편집디자이너 되기". 제주의 한 매거진 회사에서 편집디자이너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수십 가지 망상이 떠오를 때 이렇게 한 줄 적어놓는 식이다. 그러면 뭔가 '워, 워' 하고 멈춰 설 수 있으면서 동시에 오늘의 이런 나를 긍정할 수 있다.

준비된 이력서나 포트폴리오도 없으면서, 준비할 마음도 없으면서 벌써 바다 건너 산방산 아래 마을로 날아가 면접을 보고 연봉을 협상하고, 제주에 3인 가구가 살 집의 연세를 지원해달라고 말하는 나를 상상하는 게 내 망상의 방식. 그러다가 내가 과연 그럴 만한 실력이 될까? 내 디자인이 일반적인 디자인 시장에 나가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 매거진의 디자인을 책임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공부할 마음은 있는가 하는데서 좌절감을 맛보고 무기력해지는 게 내 우울의 방식이었다. 그런 부정적인 기운을 메모 한 줄로 날려버리는 거다.

오늘의 이런 나를 지워버리지 않으면서 그 메모 안에 망상의 재료들을 쏟아 가두기. 마치 지금 보고 싶지는 않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들을 서랍에 감추는 것과 같다. 그것이 실제 물건이라면 감춰놓더라도 자리를 차지하기에 언젠가 다시 고민거리가 될 테지만 메모는 다르다. 그런 메모가 자꾸자꾸 쌓이면 어느새 저만치 보이지 않게 되고, 나중에 다시 열어보더라도 "내가 그런 생각을 했나?" 싶어 웃고 마는 것이다.

사실 내가, 우리가 하는 생각의 대부분은 그저 냇물에 흘러가는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걸 주워서 뭔가 멋들어진 걸로 엮고 싶겠지만, 쌓인 지푸라기는 결국 쓰레기일 뿐. 물이 제대로 흘러가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이번 지푸라기를 흘려보내도 다음 지푸라기, 또 다음 지푸라기가 오더라. 그중 무엇이 진짜일지는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 '진짜'가 온다기보다, 내가 그걸 엮을 준비가 된 순간에 그것을 만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한 줄, 두 줄 지푸라기의 기록을 남긴 것들에 '오늘의 망상'이란 이름을 붙였다. 뭔가 그럴싸하다.


- 아이패드로 하루 한 컷 만화 그리기.


- 매일 저녁 10분 옛날 사진 정리하기. 가족이 모여서 함께 보면서 말이지.


- 물티슈와 휴지 대신 천조각을 쓸 수 있을까? 버리는 옷이나 천을 잘라서 말이야.


-(처음 참여한 도예 원데이클래스에서 비누받침을 만들어본 뒤) 나중에 비누와 비누받침을 만들어 파는 가게를 해볼까?


심지어 이런 글도 있다.


- 매일의 '오늘' 시리즈를 이어나가면 언젠가 '매일의 오늘'이라는 책이라도 만들게 될까?


내가 가끔 적는 '오늘의 하율(그날 아이가 한 기상천외한 말이나 행동을 기록하기)'이나 '오늘의 한 컷(글로 적을 만큼은 아닌, 아주 짧은 어떤 장면이나 단상의 기록)'에 이어 '오늘의 망상'을 적기로 하면서 든 망상이다. (심지어, 이 글의 카테고리도 '오늘의 밥값'이다...!)


이런 망상 그 자체가 나는 아니지만, 이런 망상을 하는 나도 현재의 나.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집착하지도 않기 위해 '오늘의 망상'을 적는다. 이 활동을 하면서, 실제로 쳇바퀴 같던 망상-무력감 카르텔 속에 갇히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일상이 약간 유쾌해졌다. 내가 하는 생각들의 무게에 잠기거나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뭔가 떠오를 때마다 득달같이 기록해대던 습관조차 줄어들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이 글도 참 오랜만이다. 확실히 나, 가벼워졌다. <아무튼, 메모>(정혜윤)를 읽다가, 그런 나를 깨닫고 이 글을 쓴다. 오늘의 가벼워진 나를 기록해두기 위해.



사실 세상은 망각에 딱 맞게 만들어져 있다. 구태여 기억할 필요도 적어놓을 이유도 없는 일로 가득하다. 우리 삶은 시간을 쓰고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다.

-<아무튼, 메모>, 정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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