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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Aug 07. 2022

'엄마'라는 발음을 하면 눈물이 난다

오늘의 밥값 33 / 그분들이 계속 꽃처럼 웃을 수 있도록


오늘은 '가족'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나의 '가족'일 수도 있고 일반명사인 '가족'에 대한 내 생각일 수도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내게 가족은 남편과 아이일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가족이란 말을 생각하려면 내 원가족, 나의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엄마와 아빠는 착하지만 경제력은 많이 부족한 분들이다. 내 언니와 나는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었더라도 꽤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한때 엄마와 아빠의 친구였을 빚쟁이들과 지금 생각하면 사채업자였을 검정 양복의 아저씨들이 매일 집 앞과 학교를 지키고, 우리 집 문을 하루 종일 두드리고, 하루 종일 전화벨을 울렸다. 그런 상황에도 언니와 나는 다른 길을 걸었다. 언니는 수능이 끝난 겨울부터 친구 아버지의 인형 공장에서 인형 눈을 붙였다. 나는 스스로 돈을 벌 생각은 하지 못했고 대학엘 가자마자 처음 만나는 자유에 취해 망나니가 되었다. 어떤 경우였든, 언니에게도 내게도 가족은 안전한 울타리라거나 의지의 대상은 아녔다. 고민을 상의할 수 있는 부모, 하루를 마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저녁식사 테이블 같은 것은 애초에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집이 있는 줄도 몰랐다.

대학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는 더욱 '반가족주의'가 되었다. 여성에게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폭력이고 질곡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마다 가족과 상의해야 한다던지,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거나 여행을 가야 해서 학생회 일정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후배들을 보면 답답했다. 가족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의지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등록금은 부모님의 영역으로만 생각하고, 용돈이나 신용카드를 받아 생활하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나 또한 그다지 독립적이거나 성숙한 어른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지성인, 어른인 척하는 망나니였다.

언니의 캐나다 유학, 언니의 결혼, 나의 결혼, 언니의 출산..  그런 대소사들을 가족의 이름으로 한 번씩 치르고, 그럴 때마다 짠한 마음들을 한 번씩 나누고는 우리는 일이 끝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서로를 침범하지 않는 것이 그저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관계 유지였다. (내가 운동권이 되는 바람에 엄마 아빠가 크게 실망하고 나와 싸웠던 과정은 여기서는 생략.)

부모, 특히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건 역시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서일 것이다. 처음 임신 사실을 확인한 날, 병원을 나와 전철역에서 엄마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임신했어." 이 간단한 말을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뭔가 그리운 이름이 저 멀리 깊고 단단한 아래에 갇혀있다가 폭우에 쓸려 떠오른 것 같았다. 그 뒤로 지금까지, '엄마'라는 발음을 할 때마다 나는 눈물이 같이 나오곤 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수년간 우울이라는 어두운 방에 혼자 앉아있을 때에도 속으로 수없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라는 발음은 내게 살아있으라 말하는 근원의 목소리 같았다. 엄마와 아빠께 한 번도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어,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돈이 없어서 너무 힘들 때 언니에게 상의하곤 했는데 언니가 엄마에게 말해서 돈을 좀 받도록 도와준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휴대폰 속 엄마 목소리에 대고 엉엉 울었다. 그 뒤로, 내 못나고 모자란 모습을 솔직하게 부모에게 보이는 것이 조금은 편해진 것 같기도 하다.

요즘 엄마,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살고 있다. 그 오래된 빚과 일수도 다 갚았다고 하고, 장사가 잘 되어 돈이 모이는 맛을 느끼는 것 같다. 가게를 쉬는 일요일에는 차를 끌고 교외로 나가 비싼 외식을 하고, 홈쇼핑으로 삼만 원에 네댓 벌씩 주는 옷을 사 입으며 행복해한다. 주말이면 가족 카톡방에 들어오는 사진 속 엄마 아빠는 내가 알던 그 어떤 엄마 아빠보다 꽃 같고 예쁘다. 이제 두 분 다 칠십이 넘어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가끔, 내 우울을 그분들께 말할까 하다가 관둔다. 돈 문제로 속상해도 웬만하면 말하지 않는다. 그냥 그분들 남은 인생이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뿐.

하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라는 발음을 하면 눈물이 나고, 커다란 어떤 품에 안겨서 엉엉 울고 어리광을 피우고 싶다. 시시콜콜 사소한 고민들을 이야기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고자질하며 흉보고 맛있는 것, 예쁜 옷을 사달라고 하고 싶다.

며칠 전 집에 놀러 온 엄마에게(이곳 시골에 이사 온 뒤로 그분들의 주말 드라이브 경유지가 우리 집인 날이 많아졌다.) 내가 만든 어설픈 요리들-토마토 스튜며 단호박 수프 등을 싸줬다. 엄마 아빠의 가게는 여름이면 너무 덥고 습해서 음식을 해 먹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엄마는 내 밭의 토마토를 한 바구니 따서 챙기며 내게 몇만 원을 쥐어줬다. 나는 "토마토 장사 재밌네!" 하고 웃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내가 만든 음식을 싸주는 날이 오네." 하고 말했다.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사십이 넘었지만 아직도 할 줄 모르는 것 천지인 딸을 보며 엄마는 어떤 마음이실까.

이번에 읽은 책*에서 작가가 부모님과 사이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다시 회복하는 내용을 보고 내 가족을 떠올렸다. 애초에 서로 기대도 없고 각자 살아내기 바빴던 우리 가족. 서로를 응원하는 애정 어린 편지나, 서로의 삶을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마음 같은 것 나는 잘 모른다. 이해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그냥 그분들이 계속 꽃처럼 웃었으면 좋겠다. 그분들이 계속 웃을 수 있는 세상이면 나도 그냥저냥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



*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 최현우



2022/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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