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율의 서재 Ep.02(2/3)

발신자 미상

by 수담
발신자미상(12화).jpg 발신자 미상 2화

영원히 받지 못했다는 것의 의미를 하영은 알고 있었다.


소주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투명한 액체가 잔 안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하영은 눈을 감았다. 15년 전 그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3년 10월 15일.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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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봄, 그들의 사랑은 조용히 시작되었다.**


병원 옥상에서 나눈 그날의 대화 이후, 민수와 하영은 자주 만났다. 야간 근무가 겹치는 날이면 새벽 여섯 시, 교대 시간이 끝나고 함께 병원 근처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뜨거운 국물을 마시며 피곤한 하룻밤을 털어냈다.


"하영 선생님은 왜 응급실을 택했어요?" 민수가 물었다.


"글쎄요. 그냥... 필요한 일 같아서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민수가 웃었다. "저랑 똑같네요."


한강을 걸을 때도 있었다. 밤 11시, 근무 시작 전 짧은 시간이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민수는 농담을 던졌고, 하영은 웃었다. 오랜만에 웃는 것 같았다.


그 해 여름, 민수가 말했다.


"하영 씨, 저랑 사귀어주실래요?"


응급실 복도였다. 환자를 이송하고 나가던 민수가 갑자기 돌아서서 물었다. 하영은 당황했다. 간호사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한가운데서 고백을 받을 줄은 몰랐다.


"... 네"


하영은 짧게 대답했다. 민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날 이후 민수는 작은 은반지를 선물했다. 커플링이었다. "비싸진 않지만, 마음은 담았어요." 하영은 그 반지를 오른손 약지에 끼웠다. 민수도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었다.


행복했다.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삶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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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눈을 떴다. 현재로 돌아왔다.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윤하영'이라는 발신자 이름이 여전히 화면에 떠 있었다.


왜 내 이름으로 전화가 왔을까.


손가락이 화면을 떠돌았다. 전화를 걸어볼까. 하지만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운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전화가 단순한 실수가 아닐 것 같은 예감. 뭔가 알게 될 것 같은.


하영은 휴대폰을 다시 내려놓고 과거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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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가을,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하영 씨, 우리 내년 봄에 결혼하면 어때요?"


한강변 벤치에 앉아 민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그즈음, 하영에게 제안이 왔다. 미국 간호사 연수 프로그램. 2년 과정이었다. 하영이 꿈꾸던 기회였다. 더 많이 배우고 싶었다. 더 많은 환자를 살리고 싶었다.


하영은 민수에게 말했다.


"민수 씨, 사실... 미국 연수 프로그램에 합격했어요."


민수의 표정이 잠깐 굳었다. 하지만 곧 환하게 웃었다.


"대단한데요! 하영 씨 꿈이잖아요."


"하지만... 2년이에요. 그동안 우리..."


"기다릴게요."


민수가 하영의 손을 잡았다. "하영 씨 꿈이라면 당연히 가야죠. 이 년쯤은 금방이에요. 저 여기서 열심히 일하면서 기다릴게요. 돌아오면 바로 결혼해요."


하영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마웠다. 이렇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하지만 망설여졌다. 정말 갈 수 있을까. 민수를 두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다. 10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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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15일, 그날.


하영은 야간 근무 중이었다. 저녁 여덟 시, 응급실은 비교적 조용했다. 민수는 오후 근무였다. 문자가 왔다.


"오늘 밤근무? 끝나고 해장국 먹으러 가자~"


하영은 미소를 지으며 답장했다. "ㅇㅇ 좋아"


밤 9시 40분. 소방무전이 터졌다. 대형 화재 사고. 상업용 건물 다섯 층에서 화재 발생. 다수 인명피해 예상.


응급실이 긴장했다. 간호사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영도 마찬가지였다. 환자를 받을 준비를 했다.


10시 40분. 민수에게서 문자가 왔다.


"큰사고야바쁠것같아나중에전화할게"


띄어쓰기도 없는 급한 문자였다. 하영은 가슴이 철렁했다. 민수가 그 현장에 출동한 것이다.


"조심해." 하영은 답장을 보냈다.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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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시부터 환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연기 흡입, 화상, 골절. 응급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영은 정신없이 움직였다.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링거를 꽂고, 혈압을 재고.


자정이 넘었다. 새벽 한 시.


"구급차 한 대 더 들어옵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하영은 고개를 들었다. 응급실 문이 열리고 들것이 들어왔다. 그 위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구급대 유니폼을 입은.


하영의 심장이 멈췄다.


민수였다.


얼굴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동료 구급대원들이 필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


"윤하영 선생님!" 담당 의사가 소리쳤다. "이쪽이에요!"


하영은 달려갔다. 손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렸다.


"민수 씨..."


하영의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간호사였다. 감정을 추슬렀다. 손을 움직였다. 바이탈을 체크했다. 의사의 지시를 따랐다.


제세동기. 전기 충격. 한 번, 두 번.


민수의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심장은 뛰지 않았다.


"다시!" 의사가 소리쳤다.


세 번째 전기 충격.


민수의 눈이 조금 떴다. 하영과 눈이 마주쳤다. 민수의 입술이 움직였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영 씨... 미안..."


"무슨 소리야,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영은 민수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아니, 너무 차가웠다.


민수가 미소를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완성되지 못했다. 눈이 천천히 감겼다.


심전도 모니터에서 긴 삐 소리가 울렸다.


"강민수 씨!" 하영이 소리쳤다. "민수 씨!"


의사가 하영의 어깨를 잡았다. "윤 선생님..."


"아니에요, 다시 해봐요! 다시!"


하영은 직접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민수의 가슴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물이 흘러내렸다.


"민수 씨, 일어나. 제발. 우리 해장국 먹으러 가야 하잖아."


하지만 민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새벽 2시 3분. 강민수, 사망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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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눈을 떴다. 현재로 돌아왔다. 얼굴이 젖어 있었다. 눈물이었다.


15년이 지났지만 그날은 여전히 선명했다. 하영은 그날 이후 많은 것을 잃었다. 미국 연수는 포기했다. 가지 못했다. 민수가 없는 곳에서 꿈을 이룬다는 게 의미 없었다.


일 년 후, 간호사도 그만뒀다. 더 이상 응급실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민수가 실려 들어오던 그 문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하영은 구급대원이 되었다. 119에 지원했다. 민수처럼 사람을 구하고 싶었다. 민수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나중에 알았다. 민수는 그날 화재 현장에서 열 살 소녀를 구했다. 건물 이 층, 불길에 갇힌 아이였다. 민수는 아이를 안고 뛰었다. 출구 앞에서 건물 일부가 무너졌다. 민수는 마지막 힘으로 아이를 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자신은...


그 소녀는 살았다. 민수 덕분에.


하지만 하영은 15년간 단 한 번도 그 소녀를 찾지 않았다. 어떻게 됐는지, 어디 있는지, 알아보지 않았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 아이를 보면, 민수가 왜 죽었는지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 내가 살았고, 그 아이가 살았고, 민수만 죽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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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윤하영'이라는 이름을 오래 바라봤다.


이 이상한 전화. 누가 내 이름을 저장했을까. 왜 지금 전화가 온 걸까.


손가락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엔 결심했다. 15년간 피해왔지만, 이제는 알아야 할 것 같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네 번째 벨이 울릴 때,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밝고 맑은 목소리.


하영은 숨을 멈췄다.


이 목소리를.


하영은 알아차렸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도 알 것 같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15년 전, 민수가 마지막으로 구한 그 아이. 열 살이었던 그 소녀.


지금은 스물다섯이 되었을.




*이 작품은 OOO의 'OOOO'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픽션입니다.


『선율의 서재 』각 에피소드는 3화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화 - 10.29.(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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