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자 미상
"여보세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하영은 숨을 멈췄다. 이 목소리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알 것 같았다.
"저... 혹시 윤하영 선생님이세요?"
하영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떻게 자신을 알까?
"네... 맞는데요. 누구시죠?"
"아, 죄송해요! 저는 이지은이라고 합니다. 스물다섯 살이고요... 지금 의대 본과 2학년이에요."
하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이 떨렸다.
지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실은요... 선생님 번호를 얻고 싶어서 한참을 알아봤어요. 그런데 구하기가 어려워서... 119 자원봉사를 시작하면서 연락처에 '윤하영'이라고 저장해 뒀거든요. 혹시나 해서요. 그런데 오늘 실수로 전화를 잘못 눌러서..."
"왜..." 하영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왜 저를 찾으셨어요?"
전화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혹시 강민수 구급대원님을 아셨나요?"
하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가 열 살 때예요. 2003년 10월 15일. 화재 사고가 있었어요. 저는 건물 이 층에 갇혀 있었고... 한 분이 저를 구해주셨어요. 구급대원 분이셨죠. 그분이 강민수 님이셨고요."
하영은 울먹이며 들었다.
"그분은 저를 구하고... 돌아가셨어요. 나중에 알았어요. 신문에서 봤어요. 그리고... 그분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 것도. 응급실 간호사셨던 윤하영 선생님."
"어떻게..." 하영이 간신히 물었다. "어떻게 저를 알았어요?"
"당시 기사에 나왔어요. 그리고 소방서에 여쭤봤어요. 용기 내서. 강민수 대원님에 대해 알고 싶다고. 그분들이 조심스럽게 알려주셨어요. 민수님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윤하영이라는 간호사님이었다고."
지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살아있는 건 그분 덕분이라는 걸. 그래서 의사가 되기로 했어요.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민수님처럼."
하영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선생님..." 지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으세요?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아니에요." 하영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선생님을 꼭 만나 뵙고 싶었어요. 제가 의대에 합격했을 때도, 첫 환자를 봤을 때도... 계속 생각했어요. 민수님과 선생님을."
하영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깨달았다. 민수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구한 생명이 이렇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다음 주에... 만날 수 있을까요?" 지은이 물었다.
"네." 하영이 대답했다. "꼭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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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혼자 남은 하영은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눈물이 계속 흘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15년간 흘렸던 그 무거운 눈물이 아니었다.
하영은 서랍을 열었다. 오래된 작은 상자가 있었다. 천천히 열자 은반지 하나가 보였다. 민수가 선물했던 커플링. 15년간 한 번도 꺼내보지 못했던.
하영은 반지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에 끼워보았다. 여전히 맞았다.
소주잔을 다시 채웠다. 하지만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민수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민수야, 들려?"
하영이 빈 공간을 향해 말했다.
"그 아이가 의사가 됐대. 네가 구한 그 아이가. 이제 스물다섯 살 이래. 의대생이고."
눈물이 또 흘렀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미안해... 15년이나 걸렸어. 이제야 전화를 건 거 같아. 너한테. 네가 항상 말했잖아. 우리가 구한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맞았어. 네 말이 맞았어."
하영은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고마워, 민수야. 내가 살아갈 이유를 다시 알려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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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후, 하영은 대학로의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가을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왔다. 따뜻했다.
"선생님!"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영이 고개를 들자 젊은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긴 생머리, 환한 미소, 또렷한 눈빛.
이지은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지은이 하영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하영은 지은을 바라봤다. 민수의 흔적을 찾았다. 이 아이의 생명 속에 민수가 있었다. 민수가 구한 생명. 민수가 마지막 순간 선택한 미래.
"저도... 만나서 정말 기뻐요."
지은이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오래된 신문 스크랩이었다.
"이거...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하영이 받아 들었다. 15년 전 신문 기사였다. 대형 화재 사고. 그리고 한 장의 사진. 흐릿했지만 작은 소녀를 안고 있는 구급대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영은 손이 떨렸다. 민수였다. 마지막 순간의 민수.
"이 사진, 제 보물이에요. 제 생명의 은인이시거든요."
하영은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민수의 뒷모습. 달리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선생님도 119에서 일하신다고 들었어요." 지은이 말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하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그저... 그 사람처럼 살고 싶었을 뿐이야."
지은이 하영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민수님은 선생님을 정말 사랑하셨을 거예요. 저도 느껴져요."
하영이 웃었다. 모처럼 진심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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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서며 하영은 생각했다.
15년간 술을 마시며 후회했었다. 전화를 붙잡고 "미안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너무 이기적이었다고, 민수를 잃었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민수는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구한 생명이 이렇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그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영도 이제는 용서받은 기분이었다. 15년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민수야. 나야."
하영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이제야 네 전화를 받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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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하영은 처음으로 평온하게 잠들었다.
꿈을 꾸었다. 민수가 나왔다. 여전히 밝게 웃고 있었다. 2003년의 민수. 스물아홉 살의, 밝고 따뜻했던.
"하영 씨, 잘 지냈어요?"
민수가 물었다. 하영이 대답했다.
"응... 이제 잘 지낼 것 같아."
민수가 웃었다. "다행이다. 제가 말했잖아요. 우리가 구한 사람들이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고. 그 사람들 생각하면 견딜 만하다고."
"응. 네 말이 맞았어."
"하영 씨는 잘하고 계세요. 저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했을 거예요."
"아니야. 나는..."
"아니에요." 민수가 하영의 손을 잡았다. "하영 씨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사람이에요. 앞으로도 많은 사람을 구할 거예요.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요. 제 몫까지."
하영이 울었다. "고마워, 민수야."
민수가 천천히 멀어졌다. 빛 속으로. 하지만 그의 미소는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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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떴다. 창문 밖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따뜻한 가을 아침이었다.
하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다.
출근 준비를 했다. 119 구급대 유니폼을 입었다. 거울을 봤다. 마흔여섯 살의 자신. 15년을 후회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오늘도 누군가를 살릴지 모른다. 민수처럼. 그리고 그렇게 구해진 생명은 또 다른 누군가를 살릴 것이다.
지은처럼.
삶은 이어진다. 희생은 헛되지 않다. 민수가 그랬듯이.
현관문을 나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새로운 출동 지령이었다. 교통사고. 부상자 다수.
하영은 주저 없이 달려 나갔다.
오늘도, 내일도...
《작가의 말》
*이 작품은 임창정의 '소주 한 잔'(2003)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픽션입니다.
술 마시며 후회하는 밤을 보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후회도 사랑의 또 다른 형태라는 생각을 합니다.
후회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었다는 증거니까요.
하지만 이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건, 후회를 내려놓는 용기였습니다.
잃은 것의 의미는 남은 자들이 만들어갑니다.
누군가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만드는 건, 그 희생을 기억하고
그 뜻을 이어가는 우리의 몫입니다.
여러분은 이 노래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시나요?
함께 나누고 싶은 추억이나 후회가 있다면 댓글로 들려주세요.
다음 작품으로 또 찾아뵙겠습니다.
따뜻한 가을 되세요.
감사합니다. - 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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