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자정 종소리

나만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

by 수담


우디 알렌의 "미드나잇 인 파리"를 다시 봤습니다. 몇 번째 보는 건지 기억도 안 나는데, 볼 때마다 새로운 기분이 들어요. 특히 주인공 길이 자정의 파리 거리에서 192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그 장면. 언제 봐도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영화를 보면서 솔직히 부러웠어요. 나도 저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고, 1920년대 파리로 가서 헤밍웨이와 술 한잔 마시고, 피츠제럴드와 문학 이야기를 나누고,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에서 예술가들과 토론하고 싶다고. 물론 말이 안 되는 소리죠.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세상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걸 다 알면서도, 그래도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왜 하필 1920년대 파리일까 생각해 보니, 그 시대가 참 매력적이긴 해요. 1차 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이 다시 예술과 문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던 시기.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조이스 같은 작가들이 한 시대, 한 도시에 모여 살았던 기적 같은 순간. 지금처럼 스마트폰도 없고, SNS도 없고, 24시간 뉴스도 없던 시절. 카페에 앉아서 하루 종일 글만 쓰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만나 와인을 마시며 예술 이야기를 나누던 그런 삶. 상상만 해도 로맨틱하지 않나요?


물론 현실은 달랐겠죠. 그 시대에도 먹고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을 테고, 지금보다 훨씬 불편했을 것도 많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왜 자꾸 그 시대가 그리워질까요?


사실 지금 제 삶이 특별히 힘든 건 아니에요. 불만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망치고 싶을 만큼 절망적이지도 않거든요. 그냥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는, 그런저런 고민들이 있는 보통의 삶. 그런데 가끔, 정말 가끔씩은 다른 시대로 떠나고 싶어 져요.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마치 평소에 입던 옷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현재라는 시대가 조금 무거워질 때가 있거든요.


어쩌면 이건 현실 도피가 아니라 일종의 휴식인지도 모르겠어요. 잠시 현재에서 벗어나 다른 시공간을 상상해 보는 것. 마치 독서나 영화 감상이 주는 그런 해방감 말이에요.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름다운 시대'라는 뜻인데, 원래는 19세기말부터 1차 대전 전까지의 유럽 황금기를 가리키는 말이었대요. 하지만 요즘은 개인적으로 그리워하는 '좋았던 시절'의 의미로도 쓰이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자신만의 벨 에포크가 있는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80년대를, 어떤 분들은 90년대를, 또 어떤 분들은 2000년대 초반을 황금기로 여기시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그 시대를 실제로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그땐 좋았지' 하면서 그리워한다는 점이에요. 그럼 대체 언제가 진짜 좋은 시대였던 걸까요?


며칠 전 혼자 카페에 앉아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어요. 만약 지금 이 카페가 1920년대 몽파르나스의 라 로통드라면? 그리고 저 구석 테이블에는 헤밍웨이가, 창가에는 피카소가 앉아 있다면? 헤밍웨이에게는 "요즘 글 쓰는 게 잘 안 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묻고 싶었고, 피카소에게는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고 싶었어요. 물론 상상 속 대화일 뿐이지만, 그런 시간들이 참 소중하더라고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니, 지금도 나름 괜찮은 시대인 것 같아요. 1920년대 파리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도 많거든요. 스마트폰만 있으면 세계 어느 도서관의 책도 읽을 수 있고, 어떤 음악이든 들을 수 있고, 어떤 영화든 볼 수 있어요. 1920년대 예술가들이 꿈꿨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어요.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새로운 헤밍웨이들이, 새로운 피카소들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겠죠. 다만 우리가 아직 모를 뿐이에요. 100년 후 사람들이 "2020년대가 참 좋았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거든요.


영화 속 길이 결국 깨달은 것처럼,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다른 시대를 그리워하나 봐요. 1920년대 사람들도 어쩌면 19세기를 그리워했을지도 모르고, 그 이전 사람들도 또 다른 시대를 동경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중요한 건 언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인 것 같아요.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얼마나 깊이 있게 살아가느냐.


물론 가끔씩은 상상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도 괜찮겠죠. 1920년대 파리의 카페에서 좋아하는 작가들과 대화를 나누는 꿈을 꾸는 것도, 그런 상상이 현재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면 말이에요. 오늘 밤 자정이 되면 저도 잠시 상상해 볼까 해요. 만약 제게도 길처럼 마법의 마차가 온다면, 어느 시대로 가고 싶을지.


생각해 보니 정답은 없는 것 같아요. 어느 시대로 가든 그곳에서도 다른 시대를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요. 그럼 차라리 지금 이 시대를, 지금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상상할 거예요. 자정의 종소리가 울릴 때, 어디선가 마법의 마차가 나타나 다른 시대로 데려가 줄 거라고. 그런 상상만으로도 오늘이 조금 더 특별해지는 것 같거든요.


#미드나잇인파리#우디알렌#벨에포크

작가의 이전글동행(同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