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나무가 약속하는 것
서점에서 우연히 펼쳐본 시집에서 이수동 화백의 「동행」을 만났습니다. 짧은 몇 줄의 시어를 읽는 순간, 가슴 한편이 먹먹해졌어요. 단순해 보이는 글자 속에 담긴 사랑의 무게가 그렇게 깊을 줄 몰랐거든요.
그때 문득 떠오른 건 오랫동안 지켜봐 온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강연장에서 만나는 부부들, 동네에서 마주치는 오래된 연인들, 그리고 제 주변의 친구들까지. 어떤 관계든 누군가는 변화하고 누군가는 지켜주는 역할을 하더라고요.
꽃은 계절마다 피고 지기를 반복합니다. 봄의 벚꽃에서 여름의 해바라기로, 가을의 코스모스에서 겨울의 동백으로. 10년이면 열 번의 계절 변화를 겪겠지요. 그 변화 속에서 때로는 화려하게,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당당하게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학창 시절 친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매년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친구였죠. 고등학교 때는 밴드에 빠져 기타를 치더니, 대학에서는 연극 동아리, 직장에 들어가서는 마라톤, 그리고 지금은 사진에 푹 빠져 있어요. 볼 때마다 다른 열정으로 가득 찬 모습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나무는 묵묵합니다.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자리를 지키며, 그 모든 계절을 가슴 깊이 새겨 넣습니다. 나이테 하나하나에는 함께한 시간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기쁜 날도, 슬픈 날도, 평범한 일상도 모두 나무의 몸 안에서 단단한 세월의 흔적으로 남습니다.
그 친구 곁에는 늘 같은 사람이 있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함께한 또 다른 친구였죠. 변화무쌍한 친구의 새로운 도전을 묵묵히 지켜보며, 때로는 응원하고 때로는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사람. 스스로는 큰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늘 그 자리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더라고요.
사랑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은 꽃처럼 변화하고, 한 사람은 나무처럼 지켜주는 것. 변화하는 사람을 탓하지 않고, 지켜주는 사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강연을 하면서 만나는 분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아요. 중년에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신 분들, 퇴직 후 전혀 다른 일에 도전하시는 분들. 그런 분들 뒤에는 대개 묵묵히 지지해 주는 가족이나 친구들이 있더라고요. "또 시작하네"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실제로는 누구보다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시는 분들 말이에요.
"타는 가슴이야 내가 알아서 할 테니"라는 구절을 읽을 때 가장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절절함과 동시에 그 마음을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거든요. 사랑의 고통까지도 혼자 감내하겠다는 다짐 속에서, 진정한 어른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남자들은 보통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걸 어려워하죠. 저도 그랬고요. 하지만 이 구절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내 감정의 무게를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무게를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 하고요. 상대방을 사랑하되, 그 사랑 때문에 상대방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
대학 시절 선배 한 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내 마음과 똑같이 사랑해 주길 바라면 안 돼. 내 사랑은 내가 책임지는 거지, 상대방이 책임져줄 수는 없으니까." 그때는 무슨 말인지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어서야 그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 "그대의 꽃향기 잃지 않으면 고맙겠다"는 말에서 사랑의 본질을 봅니다. 거창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그 사람다운 향기, 그 사람만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만 하면 된다는 소박한 간절함이 오히려 더 깊게 와닿습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감동받았어요. 사랑한다는 건 상대방을 바꾸려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구나 싶었거든요. 우리는 종종 사랑한다는 핑계로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 하잖아요. 하지만 진짜 사랑은 그 반대인 것 같아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꽃이고, 누군가에게는 나무입니다. 때로는 변화하며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때로는 변함없이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죠. 그리고 그 역할은 고정된 게 아닌 것 같아요. 상황에 따라, 시기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죠.
제가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는 주변 사람들이 나무가 되어주고, 친구들이 힘들 때는 제가 나무가 되어 지켜봐 주는 것처럼요. 그렇게 서로에게 꽃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하면서, 우리는 함께 성장해 가는 것 같습니다.
길을 나선다는 것, 그것은 결국 함께 걸어간다는 뜻일 테니까요. 꽃의 변화를 받아들이고, 나무의 든든함을 믿으며 말이에요. 혼자서는 갈 수 없는 먼 길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걸어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오늘도 누군가와 함께 걷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당신에게는 꽃인가요, 나무인가요? 그리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어떤 존재가 되고 싶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