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풍경, 다른 시선

프루스트가 말한 진짜 여행의 의미

by 수담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죠.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은 건 30대 초반이었는데, 그때는 그저 멋진 말 정도로만 여겼어요. 그때부터 시간이 더 흘러 지금, 비로소 그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스무 살 무렵, 저는 여행을 참 많이 다녔어요. 배낭 하나 메고 국내 곳곳을 떠돌아다녔죠. 설악산, 지리산, 제주도... 새로운 곳에 가면 뭔가 특별한 깨달음이 올 거라고 믿었거든요. 기차를 타고 처음 가본 동네에 내리면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여기서는 다른 내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막상 돌아오면 늘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사진은 많이 찍었지만 기억에 남는 건 별로 없고, 풍경은 달랐지만 나는 여전히 똑같더라고요. "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게 늘 답답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어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내 시선이 문제였다는 걸요.


40대 초반쯤이었을 거예요. 집 근처 북한강을 새벽에 드라이브하다가 차를 세웠어요. 십 년 넘게 수없이 지나다닌 길인데, 그날따라 강물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어요. 강 건너 산자락에 걸린 아침 햇살, 물 위를 스치는 바람의 흔적,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 차 안에서 한참을 그냥 앉아 있었어요. 묘한 감정이 밀려오더라고요. 기쁘면서도 조금 슬펐어요.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늘 여기 있었는데, 나는 왜 이제야 봤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죠. 웃긴 건 그 풍경이 언제나 거기 있었다는 거예요. 다만 제가 보지 못했을 뿐이죠. 그때 깨달았어요. "아, 내가 지금껏 눈을 감고 살았구나." 새로운 곳으로 떠날 생각만 했지, 정작 내가 서 있는 곳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요즘은 의식적으로 천천히 걸으려고 해요. 출근길에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주변을 둘러보는 겁니다. 그랬더니 신기한 게 보이더라고요. 매일 지나치던 골목 어귀 작은 꽃집 앞에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놓여 있고,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언제나 웃으며 인사를 건네시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도 제각각이에요. 어떤 날은 피곤해 보이고, 어떤 날은 가벼워 보이죠. 가끔은 카페 창가에 앉아 그냥 밖을 바라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는 하늘.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인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멀리 떠나야만 발견이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어요.


프루스트가 말한 새로운 눈이란 결국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멀리 떠나지 않아도,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선.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는 눈. 그게 진짜 여행인 거죠. 스무 살의 저는 새로운 풍경만 찾아 헤맸지만, 지금의 저는 같은 풍경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됐어요. 그게 나이 듦이 주는 선물인 것 같습니다. 오늘 하루, 한 번쯤 멈춰 서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시면 어떨까요. 어쩌면 당신이 찾던 풍경이 이미 거기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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