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 9시. 박종수는 평상시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9월의 뜨거운 햇살에 벌써 등이 따갑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떻게 발음하는 건가.'
지난 목요일 김민우 강사가 숙제를 내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읽어오라고. 도서관에 가면 책이 있을 것이다. 45년 동안 기계 부품만 들여다봤는데, 이제 와서 그리스 철학자 책을 읽는다니.
버스에 올라 창밖을 봤다. 출근길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예전엔 나도 저랬지.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 30분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향했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길, 똑같은 일. 45년 동안.
'그때는 그게 행복인 줄 알았는데.'
구립도서관에 도착하니 문이 막 열렸다. 할머니 몇 분이 신문 읽으러 들어가고 있었다. 박종수도 뒤따라 들어갔다.
"어떤 책을 찾으세요?"
사서가 친절하게 물었다. 젊은 여자였다.
"아리스토... 아리스토텔레스요. 행복에 관한 책."
"아, 『니코마코스 윤리학』 말씀이세요? 조금 어려운 책인데 괜찮으세요?"
어렵다는 말에 주춤했다. 하지만 이미 와버린 걸 어쩌겠나.
"괜찮습니다."
철학 서가에서 책을 찾았다. 생각보다 두꺼웠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번역서였지만 여전히 어려워 보였다. 해설서도 몇 권 함께 빌렸다.
창가 테이블에 앉아 책을 폈다. 첫 페이지부터 막혔다.
"모든 기예와 모든 탐구,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은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다시 읽어봤다. 그래도 모르겠다. 해설서를 펼쳤다.
'아,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다는 뜻이구나.'
기계 부품을 만드는 것도 목적이 있었다. 자동차가 잘 돌아가게 하려고. 그럼 내 인생의 목적은 뭐였을까?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는 것. 그런데 그 이후는? 은퇴하고 나서는?
"아저씨, 어려운 책 읽으시네요."
고개를 들어보니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철학과 교재들을 펼쳐놓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처음 읽으세요?"
"네... 어렵네요."
"당연하죠. 저도 철학과인데 처음엔 한 줄도 이해 못 했어요."
젊은이가 자신의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았다.
"제가 좀 설명해 드릴까요? 전공이거든요."
"그럴까요? 고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에우다이모니아'라고 했어요. 단순한 쾌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해요."
박종수는 끄덕였다.
"그럼 인간다운 삶이란 뭡니까?"
"덕을 실현하는 삶이에요. 용기, 절제, 정의, 지혜... 이런 덕을 키우고 실천하는 거죠."
"용기..."
박종수는 중얼거렸다. 용기. 자신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그거 아닐까.
"용기가 뭔지 아세요?"
젊은이가 물었다.
"음... 무서운 것도 하는 거?"
"비슷해요.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달리 봤어요. 용기는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라고 했어요."
"구분하는 능력?"
"네. 무작정 덤비는 건 만용이고, 꼭 해야 할 일을 두려워서 안 하는 건 비겁이죠. 진짜 용기는 그 중간이에요."
박종수는 생각에 잠겼다. 아들에게 전화하는 것. 그건 용기일까, 만용일까?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어요."
"천만에요. 철학은 혼자 읽기 어려워요. 같이 이야기해야 재미있어요."
젊은이가 떠난 후, 박종수는 혼자 책을 읽었다.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한순간의 기분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삶의 방식이라는 것. 덕을 키우고 실천하는 삶이 진짜 행복한 삶이라는 것.
그럼 내 인생은 어땠을까? 45년 동안 성실하게 일했다. 그건 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들과의 관계는? 아버지로서의 덕은 실천했을까?
목요일 오후 1시 50분. 박종수는 평생교육원으로 향했다. 가방 속에는 지난 며칠간 읽은 아리스토텔레스 책과 빼곡한 메모가 들어 있었다.
강의실에 들어서니 이번에도 비슷한 사람들이 와 있었다. 지난주와 똑같은 자리에 앉았다. 맨 앞자리. 공책과 색깔 펜들을 정리했다.
"안녕하세요."
김민우 강사가 들어왔다. 오늘도 분필을 들고 칠판에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지난주 숙제 하신 분 있어요?"
박종수가 손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놀란 듯 쳐다봤다.
"박종수 선생님, 어떠셨어요?"
"어려웠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이 인상 깊으셨어요?"
"음..." 박종수는 잠시 생각했다. "행복이 그냥 기분 좋은 게 아니라 덕을 실천하는 거라는 말이요."
"좋은 지적이에요. 그럼 덕이 뭘까요?"
"용기, 절제, 정의... 그런 것들이요."
"맞아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두 종류로 나눴어요. 지적 덕과 품성적 덕. 오늘은 품성적 덕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김민우는 칠판에 여러 덕목들을 적었다.
"이 중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덕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정수연이 손을 들었다.
"절제요. 아이한테 화내지 않는 게 힘들어서..."
조현우가 말했다.
"정의요. 회사에서 부당한 일들을 보면..."
박종수도 손을 들었다.
"용기입니다."
"어떤 용기요?"
"음..." 박종수는 망설였다. 사적인 이야기를 해도 될까. "가족한테... 먼저 다가가는 용기요."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박종수를 바라봤다.
"좋은 말씀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용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용기를 단순히 무서움을 모르는 것으로 보지 않았어요."
김민우는 칠판에 그림을 그렸다. 가운데 '용기', 양쪽에 '만용'과 '비겁'.
"용기는 만용과 비겁의 중간이에요. 무작정 덤비는 것도, 꼭 해야 할 일을 피하는 것도 진짜 용기가 아니죠."
박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서관에서 들은 이야기와 같았다.
"그럼 어떻게 진짜 용기를 키울 수 있을까요?"
이순영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습하는 거 아닐까요? 작은 것부터..."
"맞아요. 덕은 습관이에요. 용기도 용기 있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키워지는 거죠."
강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가기 시작했다. 박종수는 짐을 정리하며 생각했다. 작은 것부터 연습한다... 아들에게 전화하는 것도 용기의 연습일 수 있겠구나.
"박종수 선생님."
뒤돌아보니 60대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저는 이정호라고 합니다. 오늘 처음 왔어요."
"아, 안녕하세요."
"혹시 시간 되시면 커피라도 한잔 어떠세요? 같은 나이대라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박종수는 잠시 망설였다. 낯선 사람과 커피를 마시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았다.
"좋습니다."
평생교육원 근처 작은 카페에서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이정호는 아메리카노를, 박종수는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몇 살이세요?"
"일흔둘입니다."
"저는 예순둘이에요. 작년에 명예퇴직했어요."
"어떤 일 하셨어요?"
"공무원이었어요. 시청에서 38년 동안. 박종수 선생님은요?"
"기계공이었습니다. 45년 동안 부품 만드는 일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나이도 비슷하고, 은퇴한 지도 얼마 안 됐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오늘 강의 어떠셨어요?"
"좋더라고요. 그런데 용기 이야기할 때..."
박종수는 말을 멈췄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족 이야기를 해도 될까.
"뭔가 개인적인 일이 있으시군요."
이정호가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래요. 퇴직하고 나니까 가족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가족이 어떻게 되세요?"
"아내랑 딸 하나 있어요. 그런데 38년 동안 일만 하다 보니 집에서는 존재감이 없더라고요. 이제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내가 부담스러워해요."
박종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아들하고... 사이가 안 좋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글쎄요. 언제부터인지... 아들이 대학 다닐 때부터 대화가 없어졌어요. 제가 말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박종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도 연락 안 하세요?"
"가끔... 명절 때나 안부 문자 정도."
"손자는요?"
"열 살인데... 할아버지 얼굴도 잘 기억 못 할 거예요."
두 사람은 잠시 조용했다.
"오늘 강의에서 용기 이야기 들으니까 생각나더라고요. 아들한테 먼저 연락해 볼까 하고."
"좋은 생각이에요. 저도 그래야겠어요. 가족한테 더 다가가려고."
이정호가 격려하듯 말했다.
"그런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전화하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냥 솔직하게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가 아들 보고 싶다고 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잖아요."
박종수는 생각에 잠겼다. 맞다. 별게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리스토텔레스 말처럼 작은 것부터 연습해 봐야겠어요."
"그래요. 저도 오늘 집에 가서 아내한테 더 관심 가져봐야겠어요."
두 사람은 한 시간 정도 더 이야기했다. 은퇴 후의 생활, 가족과의 관계, 새로 시작하고 싶은 것들. 박종수는 오랜만에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다음 주에도 강의 들으러 오실 거죠?"
"물론이죠. 박종수 선생님 덕분에 용기가 생겼어요."
카페를 나서며 박종수는 생각했다. 이런 것도 용기의 결과인가. 낯선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속마음을 이야기하고. 작은 변화지만 의미 있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 박종수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휴대폰을 손에 들고 아들의 번호를 찾았다. "민수"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전화했나? 추석 때였던가.
'뭐라고 말하지?'
그냥 안부 인사? 아니면 손자 안부? 아니면 만나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들의 목소리였다. 3년 전과 비슷했다.
"민수야, 아빠다."
"아, 아빠... 무슨 일이세요?"
목소리가 경계하는 듯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놀란 모양이었다.
"별일은 아니고... 그냥 안부가 궁금해서."
"아, 네... 저는 괜찮아요."
"민준이는 어때? 건강해?"
"네, 잘 지내요."
대화가 끊어졌다. 뭔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 요즘 공부를 하고 있어."
"공부요?"
"응. 인문학 수업을 듣고 있어."
"아빠가요?"
놀라는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이상해? 나이 들어서 못 배워?"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
"목요일마다 평생교육원에 가고 있어. 철학 공부를."
"와... 대단하시네요."
처음으로 아들 목소리에 관심이 느껴졌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 이야기를 배웠는데..."
박종수는 오늘 배운 내용을 간단히 설명했다. 행복과 덕에 대한 이야기, 용기에 대한 이야기.
"아빠가 그런 걸 배우시다니... 정말 신기해요."
"나도 신기해. 이 나이에 이런 걸 배우게 될 줄 몰랐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빠..."
"응?"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혼자 계시는데 심심하지 않으세요?"
아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안부를 물었다. 박종수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괜찮아. 공부도 하고... 새로운 친구들도 생기고."
"친구요?"
"응. 오늘도 이정호 씨라고 나랑 비슷한 나이의 분이랑 커피 마셨어."
"아빠가 누구랑 커피를 마셔요?"
아들의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왜? 나는 친구 못 사귀나?"
"아니에요. 좋은 일이에요. 아빠한테 친구가 생기니까."
대화가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박종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민수야, 시간 될 때 민준이랑 같이 할아버지 집에 놀러 와."
"네?"
"할아버지가 손자 보고 싶어."
아들이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이도... 할아버지 보고 싶어 할 거예요."
"정말?"
"네. 가끔 할아버지 언제 보냐고 물어봐요."
박종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럼... 이번 주말에?"
"저는 좋은데... 회사 일이 좀 있어서. 다음 주말은 어떠세요?"
"좋아. 다음 주말에 오렴."
"네. 그럼 아빠, 전화해서 고마웠어요."
"뭘..."
"아빠가 먼저 연락해 주셔서. 저도 연락드리고 싶었는데 그동안 못했어요."
"너도?"
"네. 아빠 혼자 계시는데 연락도 안 드려서 죄송했어요."
박종수는 뭔가 목이 메었다. 아들도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아니다. 아빠가 먼저 연락했어야 했어."
"아빠, 다음 주말에 민준이랑 갈게요. 그때 인문학 공부 이야기도 더 들려주세요."
"그래. 재미있을 거야."
전화를 끊고 박종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쉬웠다. 왜 그동안 전화하지 못했을까? 괜히 어렵게 생각했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용기.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능력. 아들에게 전화하는 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박종수는 공책을 꺼내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적었다. 도서관에서 만난 철학과 학생, 강의 시간에 배운 용기에 대한 이야기, 이정호 씨와의 커피, 그리고 아들과의 전화.
"오늘의 용기: 아들에게 전화하기. 성공."
다음 줄에 적었다.
"다음 주말: 아들, 손자와 만나기."
그리고 마지막 줄에.
"아리스토텔레스 말이 맞다. 용기는 연습하는 거다."
박종수는 공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봤다. 9월의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마음은 시원했다. 72세에 시작한 첫 질문이 첫 번째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내일은 또 도서관에 가서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더 읽어봐야겠다. 이정호 씨와도 다시 만나 보고. 그리고 다음 주 목요일 강의도 기대된다.
새로운 시작이 이렇게 시작되는 건가. 한 걸음씩, 조금씩.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박종수는 처음으로 은퇴 후의 삶이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