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오전 6시 30분. 정수연은 알람보다 10분 일찍 눈을 떴다. 몸이 알아서 깨는 지경이 되었다. 옆에서 자고 있는 재혁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 일어났다.
지우는 아직 깊이 잠들어 있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놀아서 피곤한 모양이다. 한 시간 정도 더 잘 수 있을 것이다.
'그 한 시간이 내 시간.'
씻고 나와 거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어제 받은 이메일을 확인했다. 성림출판사에서 온 메일이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정수연 편집자님. 오랜만입니다. 최근 편집팀 확충 계획이 있어 연락드립니다..."
손이 떨렸다. 3년 전 그만둔 출판사였다. 그때 팀장이었던 김현정 선배가 보낸 메일이었다.
"복직에 관심이 있으시면 면담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파트타임도 가능합니다."
정수연은 화면을 한참 바라봤다. 복직. 3년 전 결혼과 함께 접은 꿈이었다. 편집자로서의 정체성, 책을 만드는 기쁨, 작가들과 나누던 깊이 있는 대화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마음속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결혼 전부터 몇 번이나 들은 말이었다. 아이가 클 때까지는 엄마가 집에 있어야 한다고. 안정적인 육아가 최우선이라고.
"엄마!"
지우가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7시 30분. 늘 그랬듯 정확했다.
"지우야, 잘 잤어?"
"응! 엄마, 오늘 뭐 해?"
"어린이집 가고, 엄마는 공부하러 가고."
"또 공부해? 엄마는 어른인데 왜 공부해?"
7살 아이에게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어른이 되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줄 알던 때가 있었다.
"어른도 배워야 할 게 많아."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 어린이집에서 친구들하고 놀아야지."
지우를 씻기고 아침을 먹이는 동안 계속 그 메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파트타임이면 가능할까? 지우가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에만 일하면?
재혁은 평상시처럼 출근 준비를 하며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나갔다.
9시에 지우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왔다.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다시 성림출판사 메일을 읽어봤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아무튼, 살아간다』 기억하시죠? 정수연 님이 담당했던 책입니다. 그 작가가 후속작을 내고 싶어 하는데, 정수연 님과 다시 작업하고 싶다고 하네요."
가슴이 뛰었다. 박미래 작가. 신인이었을 때 처음 담당했던 작가였다. 함께 밤새워 원고를 다듬고, 제목을 고민하고, 표지를 선택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니.
화요일과 수요일은 그 메일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하루 종일 복직에 대한 생각만 했다. 하고 싶은 마음과 현실적 고민 사이에서 계속 흔들렸다.
목요일 아침. 지우를 씻기고 아침을 먹이는데 재혁이 넥타이를 매며 물었다.
"자기야, 오늘 몇 시에 와?"
"5시까지는 와야 해. 지우 데리러 가게."
"목요일마다 그 수업 듣는다고 바빠 보이네."
목소리에 살짝 불만이 섞여 있었다.
"한 달에 네 번밖에 안 해."
"그래도 엄마가 없으면 지우가 불안해하잖아."
정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대화는 늘 같은 방향으로 흘렀다. 엄마의 역할에 대한 재혁의 고정관념 앞에서 자신의 생각은 늘 이기적인 것이 되었다.
목요일 오후 1시 30분. 지우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평생교육원으로 향했다.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오늘은 조금 일찍 와서 복도 끝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다시 한번 그 메일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수연 씨?"
뒤돌아보니 이순영이 서 있었다. 첫 시간에 자기소개했던 분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저 때문에 방해되면..."
"아니에요. 앉으세요."
이순영은 조심스럽게 앞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어색한 듯했다.
"일찍 오셨네요."
"네...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요."
"혼자 사세요?"
이순영이 잠시 망설였다.
"네. 작년에... 이혼했거든요."
정수연은 괜히 말을 꺼낸 것 같아 미안했다.
"죄송해요. 괜한 말을..."
"아니에요. 이젠 괜찮아요. 오히려... 홀가분한 면도 있어요."
"홀가분하다는 게?"
"그동안 누군가의 아내로만 살았는데, 이제 저 자신으로 살 수 있잖아요."
이순영의 말에 정수연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부러움 같은 것이었다.
"저는... 반대예요. 결혼하고 나서 제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어떤 일을 하셨어요? 예전에."
"편집자였어요. 출판사에서 7년 동안. 그런데 결혼하면서 그만뒀죠."
"왜요?"
"남편이... 아이가 생기면 일 계속하기 어렵다고 해서요.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요."
이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그 일 하고 싶어요?"
정수연은 휴대폰 속 메일을 생각했다.
"글쎄요... 하고는 싶은데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현실적으로?"
"아이 돌봄 문제도 있고, 남편도 반대할 것 같고..."
"남편분이 왜 반대하세요?"
"아이에게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정수연은 말을 멈췄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다.
"정수연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저요? 저는..."
정수연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의 생각은 뭘까? 늘 남편의 의견, 아이의 필요, 주변의 시선만 고려했지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잘 모르겠어요."
두 시가 되어 강의실로 들어갔다. 박종수 할아버지가 벌써 와서 공책을 펼쳐놓고 있었다. 지난주보다 편안해 보였다.
김민우 강사가 들어와서 칠판에 이름을 적었다.
"에픽테토스 (Epictetus, 55~135)"
"오늘은 스토아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에픽테토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정수연은 노트에 이름을 적었다. 생소한 이름이었다.
"에픽테토스는 노예 출신의 철학자입니다. 어려서 로마로 팔려와서 노예로 살았지만, 주인이 철학을 공부하게 해 줘서 후에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죠."
노예 출신 철학자. 흥미로웠다.
"에픽테토스의 핵심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김민우는 칠판에 적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
정수연은 펜을 멈췄다.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에픽테토스는 말했습니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은 우리의 판단, 욕망, 행동이다.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은 우리의 몸, 재산, 명예, 권력이다.'"
조현우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내 몸도 내 통제 밖이라는 얘기예요?"
"맞습니다. 내가 아무리 건강하고 싶어도 병에 걸릴 수 있고,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내 몸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 병에 걸렸을 때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 것인지는 내 선택이에요."
정수연은 끄덕였다. 그렇다면 재혁의 생각,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 선택이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것에 스트레스받고 계세요?"
강미숙이 말했다.
"저는... 자식들이 자주 안 와서 속상해요."
"자식들이 오는 것은 강미숙 님이 통제할 수 있나요?"
"음... 못 하죠. 걔들 마음이니까."
"맞아요. 하지만 자식들에게 어떻게 대할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릴지는 님의 선택이에요."
박종수가 말했다.
"저는 지난주에 아들한테 전화했는데... 그전까지는 아들이 연락 안 한다고 서운해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먼저 연락하니까 아들도 좋아하더라고요."
"좋은 예시네요. 아들의 반응은 통제할 수 없지만, 먼저 연락하는 것은 박종수 님의 선택이었던 거죠."
정수연은 생각했다. 재혁이 복직을 반대하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그런데 가끔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조차 선택하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정수연이 말했다.
"어떤 경우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일을 다시 시작할지 말지 같은 것들. 분명히 내 선택인데 여러 가지 고려할 게 많아서..."
"좋은 질문이에요. 그런 경우에 에픽테토스는 뭐라고 했을까요?"
김민우는 잠시 생각하더니 칠판에 또 다른 문장을 적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나머지는 운명에 맡겨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에요. 하지만 그 결정의 결과는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죠. 중요한 건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나머지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이순영이 정수연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 더 할까요?"
"좋아요."
다시 카페에 앉아서 이순영이 말했다.
"오늘 강의 들으니까... 정수연 씨 일 때문에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네... 사실 오늘 아침에 예전 직장에서 연락이 왔어요. 복직하겠냐고."
"와, 정말요? 어떻게 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하고는 싶은데..."
정수연은 휴대폰을 꺼내 메일을 보여줬다.
"파트타임도 가능하다고 하네요."
"그럼 좋잖아요. 아이 어린이집 보내고 일하고."
"그런데 남편이 뭐라고 할지..."
이순영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정수연 씨, 에픽테토스 말 기억해요? 남편 생각은 정수연 씨가 통제할 수 없어요. 하지만 정수연 씨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정수연 씨 몫이죠."
정수연은 커피컵을 돌렸다.
"쉽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워요. 결혼생활이라는 게..."
"저도 알아요. 10년 동안 결혼생활했거든요. 늘 남편 눈치 보면서 살았어요. 내 의견보다는 남편이 원하는 게 뭘까만 생각하고."
"그래서 이혼한 거예요?"
이순영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도 있지만... 더 큰 건 제가 없어져 버린 거예요. 정말로. 거울을 봐도 누군지 모르겠더라고요."
정수연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때요?"
"힘들지만... 적어도 제 선택으로 살고 있어요. 에픽테토스 말처럼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려고 해요."
두 사람은 한참 조용히 앉아 있었다.
"정수연 씨는 진짜 뭘 원해요?"
이순영의 질문에 정수연은 깊게 생각했다.
"일을 다시 하고 싶어요. 편집자로서의 제가 그리워요. 하지만... 지우에게 나쁜 엄마가 되고 싶지도 않고."
"그 둘이 양립할 수 없는 건가요?"
"글쎄요... 재혁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재혁 씨 생각 말고, 정수연 씨 생각은요?"
정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남편의 기준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오니 재혁이 벌써 와 있었다. 지우는 거실에서 블록놀이를 하고 있었다.
"엄마!"
지우가 달려와 안겼다.
"오늘도 공부했어?"
"응."
"뭐 배웠는데?"
"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걸 배웠어."
재혁이 TV에서 눈을 떼고 바라봤다.
"그게 뭔 말이야?"
"스토아철학이라는 건데..."
정수연은 간단히 오늘 배운 내용을 설명했다.
"흠... 그럴듯하네. 근데 그런 걸 배워서 뭐 해?"
"몰라. 그냥...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저녁을 먹이고 지우를 재운 후, 정수연은 거실에서 재혁과 마주 앉았다.
"여보, 할 말이 있어."
"응?"
"오늘 성림출판사에서 연락이 왔어."
재혁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
"복직 제안을 했어. 파트타임으로도 가능하다고."
"갑자기 왜?"
정수연은 메일 내용을 설명했다. 박미래 작가 이야기, 베스트셀러가 된 책 이야기.
"그래서?"
"그래서... 해보고 싶어."
재혁이 한숨을 쉬었다.
"수연아, 우리 이 얘기 몇 번 했지? 지우가 아직 어려서 엄마가 필요한 시기라고."
"파트타임이면 어린이집 있는 시간에만 일하는 거잖아."
"그래도 일하면 피곤하고 스트레스받아서 지우한테 영향 갈 거야."
"꼭 그럴까?"
"당연하지. 네가 일할 때 어떻게 변했는지 기억 안 나? 밤늦게 와서 피곤해하고..."
정수연은 반박하고 싶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고. 파트타임이라고. 하지만 재혁의 확신에 찬 목소리 앞에서 말이 막혔다.
"그리고... 솔직히 우리 경제적으로도 그렇게 어렵지 않잖아. 굳이 네가 일해서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어."
"돈 때문에 일하는 게 아니야."
"그럼 뭐 때문에? 자아실현? 그런 거는 지우 크고 나서 해도 되잖아."
정수연은 답답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편집자로서의 정체성을, 창조적인 일에 대한 열정을, 박미래 작가와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책에 대한 기대를.
"여보는... 나를 믿지 않는 거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거지. 아이 키우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나도 알아. 하지만 일과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
"생각만으로는 안 되잖아. 실제로 해보면 둘 다 중요하니까 스트레스받고..."
재혁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지우가 깰까 봐 정수연이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그럼... 시험 삼아해 보면 어떨까? 안 되면 그만두고."
"수연아, 한 번 시작하면 그만두기 어려워. 특히 네 성격에는."
재혁의 말이 맞았다. 정수연은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다.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내려고 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지우가 초등학교 고학년 될 때까지는..."
"그럼 5년을 더?"
"빨리 가. 그동안 네가 쉬는 것도 좋은 거야."
대화는 평행선이었다. 정수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에픽테토스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라.'
재혁의 생각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선택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다음날 오후, 지우가 갑자기 열이 났다.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지우 엄마, 아이가 열이 38.5도까지 올라서 오셔야 겠어요."
정수연은 서둘러 지우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축 늘어져 있었다.
"지우야, 어디 아파?"
"목이 아파요, 엄마."
소아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다. 목감기였다. 3일 정도 푹 쉬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다.
집에 돌아와 지우를 재우고 나서 정수연은 죄책감에 휩싸였다. 일을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아이가 아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재혁의 말이 맞는 걸까? 엄마로서 더 집중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핸드폰이 울렸다. 성림출판사 김현정 선배였다.
"수연아, 메일 받았지? 어떻게 생각해?"
"선배... 아이가 갑자기 아파서..."
"아, 그래? 많이 아파?"
"목감기예요. 그런데 제가 일 생각만 하고 있어서 아이가 아픈 것도 몰랐어요."
"뭔 소리야. 아이들은 원래 잘 아파. 엄마 탓이 아니야."
"하지만..."
"수연아, 나도 아이 둘 키우면서 일했어. 물론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야. 특히 너처럼 실력 있는 편집자는 더더욱."
김현정의 말에 정수연은 흔들렸다.
"그래도 남편이 반대해서..."
"남편 설득은 네 몫이지. 중요한 건 네가 진짜 원하는지 야. 수연아, 솔직히 말해. 일하고 싶어?"
정수연은 한참 생각했다. 에픽테토스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
"네. 하고 싶어요."
"그럼 되는 거야. 방법은 찾아지는 거고."
전화를 끊고 정수연은 지우의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열이 조금 내린 것 같았다.
일과 육아. 정말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아니면 재혁과 내가, 그리고 사회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걸까?
정수연은 노트북을 켜고 김현정 선배에게 답장을 썼다.
"선배, 면접 일정 잡아주세요. 자세한 조건들을 들어보고 싶어요."
메일을 보내고 나서 가슴이 뛰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섞인 감정이었다.
다음 주 목요일, 지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강의를 들으러 갔다.
오늘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강의였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정수연은 메모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다.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도했죠.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맞다. 선택의 자유가 때로는 괴롭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중요한 건 우리가 내린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 탓, 환경 탓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거죠."
강의가 끝나고 이순영과 또 커피를 마셨다.
"어제 출판사랑 면접 잡았어요."
"정말요? 잘했어요!"
"아직 남편한테는 말 안 했어요. 면접 보고 나서 결정하려고."
"언제 면접이에요?"
"다음 주 화요일이요."
이순영이 격려하듯 말했다.
"잘될 거예요. 정수연 씨가 원하는 일이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정수연은 생각했다. 에픽테토스와 사르트르의 말이 묘하게 연결되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면접을 보는 것. 그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다. 면접 결과는 통제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임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을 할지 말지도 결국은 내 선택이다. 재혁을 설득할 수 있을지, 일과 육아를 양립할 수 있을지는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도해 보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정수연은 처음으로 확신을 가졌다. 면접을 보겠다고.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 재혁과 진지하게 이야기하겠다고.
지우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는 길에 아이가 물었다.
"엄마, 오늘 무슨 공부했어?"
"선택에 대해서 배웠어."
"선택이 뭐야?"
"음... 여러 개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거야. 지우도 매일 선택하잖아. 뭐 입을지, 뭐 먹을지."
"그럼 엄마도 선택해?"
"그럼. 엄마도 선택해야 할 일들이 많아."
"어떤 거?"
정수연은 지우의 손을 잡고 웃었다.
"엄마가 어떻게 살지... 그런 거."
그날 밤 재혁이 잠든 후, 정수연은 거실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내일 재혁에게 면접 이야기를 해야겠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 선택을 분명히 하겠다.
72세 박종수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건 것처럼, 32세 정수연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용기를 내어 선택하겠다.
창밖으로 9월의 밤바람이 불어왔다. 이제 조금씩 선선해지기 시작하는 계절이었다.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바람 같았다.
정수연은 노트북을 열고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3년 전의 자신을 되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