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 정지용

아이에게 들려주는 고향 이야기

by 수담

향수 - 정지용


넓은 벌 동쪽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 시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줏던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아이에게 들려주는 고향 이야기


"아빠, 고향이 뭐야?"

응, 고향이란 건 말이야

넓은 벌판이 있고

실개천이 흐르고 황소가 우는 곳이란다


"우리 아파트 근처엔 그런 거 없는데?"


그래, 너희는 없지

하지만 아빠가 어렸을 때는 말이야

(아니, 아빠 때도 이미 없었지만 아빠의 아빠는 분명 그런 곳에서 자랐을 거야)


"그럼 우리 고향은 어디야?"


글쎄다

너희들은 이 아파트가 고향이 될까

아니면 너희가 어른이 되어서도

문득 그리워할 '그곳'이 생길까


"잘 모르겠어"


아빠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네가

차마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곳이 생긴다면

그곳이 네 고향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