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책장
여자의 서랍 - 노영임
여자는 책상이랍니다
서랍이 여럿 달린
그 속엔 머리핀에서
잉크 굳은 만년필까지
사소한 것일지라도
의미 없는 건 없답니다
부쩍 말수 줄어든
폐경기 무렵부터인가
좀처럼 마음의 문
열지 않겠다는 듯
서랍은 꾹 다문 입술
은밀함을 키워요
맨 아래 서랍 속으로
꼭꼭 숨어든 그녀
낯선 도시 소인 찍힌
몇 통의 편지 두고
하나씩 퍼즐 맞추듯
시간을 유추하기도 하죠
화로 속 불씨처럼
비밀도 많답니다
장난하듯 불쏘시개
뒤적거린 날에는
붉은빛
초경의 꿈을 영락없이 꾸고 말죠
남자의 책장
남자는 책장이랍니다
책들이 빼곡히 꽂힌
그 속엔 메모에서
접힌 편지 한 통까지
사소한 것일지라도
의미 없는 건 없답니다
부쩍 말수 줄어든
은퇴 무렵부터인가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겠다는 듯
책등은 꾹 다문 입술
위엄을 키워요
맨 위 칸 속으로
꼭꼭 숨어든 그
낯선 회사 이름 적힌
몇 장의 명함 두고
하나씩 퍼즐 맞추듯
시절을 유추하기도 하죠
책갈피 속 사진처럼
후회도 많답니다
장난하듯 오래된 책
뒤적거린 날에는
푸른빛
첫 면도의 꿈을 영락없이 꾸고 말죠
《작가의 말 》
원작 「여자의 서랍」이 여성의 은밀한 내면을 서랍에 비유했다면, 화답시 「남자의 책장」은 남성의 감춰진 세계를 책장에 담았습니다.
서랍과 책장은 둘 다 무언가를 담는 공간이지만, 서랍이 '닫혀있고 안으로 향한' 공간이라면 책장은 '열려있는 듯 보이지만 여전히 비밀을 간직한' 공간입니다. 이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차이—여성은 은밀함을, 남성은 당당함을 강요받지만, 둘 다 내면 깊은 곳에는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머리핀에서 잉크 굳은 만년필까지"를 "메모에서 접힌 편지 한 통까지"로 바꾸어, 책장이라는 공간에 자연스럽게 놓일 수 있는 물건들로 구성했습니다. 짧은 메모에서 정성스럽게 접힌 편지로 이어지는 흐름은, 가벼운 기록에서 깊은 감정의 흔적으로 확대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원작의 "폐경기"를 "은퇴 무렵"으로, "초경"을 "첫 면도"로 대응시켜 남성의 생애주기를 담았습니다. 여성의 몸에 새겨진 시간이 있다면, 남성에게는 사회적 역할에 새겨진 시간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낯선 도시 소인 찍힌 편지"를 "낯선 회사 이름 적힌 명함"으로 바꾸어, 여성의 은밀한 사랑이 남성에게는 이루지 못한 야망이나 다른 삶의 가능성으로 나타남을 표현했습니다.
특히 "화로 속 불씨처럼 / 비밀도 많답니다 / 장난하듯 불쏘시개 / 뒤적거린"이라는 원작의 논리적 연결을 살려, "책갈피 속 사진처럼 / 후회도 많답니다 / 장난하듯 오래된 책 / 뒤적거린"으로 대응시켰습니다. 책갈피 사이에 끼워둔 오래된 사진을 발견하듯, 우연히 꺼낸 책에서 잊고 있던 후회와 마주치는 순간을 담았습니다.
"붉은빛"과 "푸른빛"의 대비로 여성과 남성의 다른 정서를 암시하되, 둘 다 잊지 못하는 '시작의 순간'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화답시를 허락해 주신 노영임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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