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스무 살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멋있는 말'이구나 하고 넘어갔어요. 죽음이라는 건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스무 살에게 죽음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 문장의 무게가 점점 실감 나기 시작했어요.
초임발령.. 가르치던 학생 하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통사고였어요. 장례식장에서 반아이들과 함께 울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했어요. 며칠 전까지 함께 공부하고 농담을 주고받던 녀석이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니. 그때 처음으로 죽음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30대 중반에는 아버지를 보내드렸어요. 투병 생활이 길었던 터라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니까 준비가 무슨 소용인가 싶더라고요. 하지만 이상한 건, 슬픔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거예요. 오랜 고통에서 해방되신 아버지를 보며 안도감도 함께 느꼈거든요. 그때 비로소 알았어요. 죽음이 단순히 '끝'이 아니라 때로는 '쉼'이기도 하다는 걸.
얼마 전 광릉수목원에서 350년 된 밤나무를 보면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 거대한 나무 곁에는 쓰러져서 썩어가는 고목들이 여러 그루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좀 을씨년스럽다 싶었는데, 숲해설가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저 죽은 나무들이 썩으면서 토양을 풍요롭게 해서 새로운 나무들이 자랄 수 있게 해 줍니다. 숲에서는 죽음과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아, 이거구나 싶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한 그 의미가.
사실 우리 일상에서도 죽음은 늘 함께하고 있어요. 어제의 내가 죽어야 오늘의 내가 태어나고, 지난해의 꿈이 죽어야 올해의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심지어 우리 몸의 세포들도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면서 생명을 유지하잖아요.
요즘 제가 웹소설과 브런치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일 수 있겠어요. 20년 넘게 수학교사로만 살아온 '예전의 나'가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대신, 작가로서의 '새로운 나'가 태어나고 있는 거죠. 물론 완전히 바뀌는 건 아니에요. 여전히 수학도 가르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 무언가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50대를 넘어서면서 더욱 확실해진 게 있어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것까지 포함해서 삶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낫다는 것. 물론 여전히 무섭고 슬픈 일이지만, 그것도 삶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편해지더라고요.
예전에는 '언젠가는 죽을 텐데 왜 이렇게 열심히 사나' 하는 허무주의에 빠지곤 했어요. 특히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더욱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예요. '언젠가는 죽을 텐데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어요.
얼마 전 의료진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요양병원에서 일하다 보니까 느끼는 게 있어. 죽음을 앞둔 분들 중에 후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야. 했던 일보다는 하지 않았던 일들을 더 아쉬워해."
그 말이 참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요즘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핑계를 만들지 말고 일단 해보려고 해요. 브런치스토리에 글 쓰기도 그중 하나고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또 이런 말도 했어요.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일부다." 비슷한 말이지만 조금 다른 뉘앙스죠. 죽음이 삶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거라는 뜻으로 들려요.
생각해 보면 죽음이라는 유한함이 있기 때문에 삶이 더 소중하고 아름다워지는 것 같아요. 만약 영원히 산다면 오늘의 일몰이 이렇게 아름다울까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시간이 이렇게 소중할까요?
며칠 전 아침, 출근길에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평소 지나다니던 길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있는 걸 본 거예요. 잠깐 멈춰서 그 고양이를 내려다보는데, 이상하게 슬프지가 않더라고요. 대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고양이도 나름 열심히 살았을 텐데. 쥐도 잡고, 햇볕도 쬐고, 다른 고양이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그리고 문득 깨달았어요. 죽음이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삶의 모든 순간들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걸. 그 길고양이의 작은 생도, 제 평범한 일상도, 모두 소중한 것들이구나 하고요.
요즘은 가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100년 후쯤, 저도 저 350년 된 밤나무 앞을 걸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될까 하고요. 아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제가 그 순간을 충분히 느꼈다는 거, 그리고 지금도 계속 느끼고 있다는 거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문장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죽음과 삶이 서로 맞서는 적이 아니라 함께 춤추는 파트너라는 것. 그리고 그 춤이 생각보다 아름답다는 것도요.
오늘도 저는 삶 속에 스며든 죽음을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무섭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선물 같다고 생각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