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우리들 마음에 새기는 것
얼마 전 강연이 끝나고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저는 20년 전에 유학 갈 기회가 있었어요. 근데 무서워서 안 갔거든요. 그게 지금도 후회돼요. 이게 제 운명인가요?" 그분의 목소리에는 지난 세월의 무게가 묻어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시구가 있었어요.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유치환 시인의 시 「너에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멋진 문장 정도로 여겼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 무게가 달라짐을 느낍니다.
우리는 운명을 뭔가 거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늘이 정해준 것, 바꿀 수 없는 것,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각본 같은 것으로요. 그래서 힘든 일이 생기면 "운명이니까 어쩔 수 없지"라고 말하곤 해요. 편하긴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책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이 시구는 정반대를 이야기합니다. 운명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선택하는 거라고요. 피할 수 있었던 것을 피하지 않았을 때, 그게 바로 운명이 된다고 말이에요.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갈림길이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때도 선택이고,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선택이고, 퇴근 후 책을 펼칠지 TV를 볼지도 선택이에요. 대부분은 사소한 선택들이지만, 가끔은 인생을 바꿀 만한 큰 선택 앞에 서기도 합니다.
고백할지 말지, 이직할지 말지, 도전할지 말지. 그런 순간들이 있어요. 그때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편안함 때문에, 주변의 시선 때문에 피하고 싶어 집니다. 안전한 길을 택하고 싶어 지죠. 괜찮습니다,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그 순간의 선택이 결국 우리의 운명을 만든다는 거예요.
제 친구 중에 이런 사람이 있어요. 대기업 다니다가 40대에 요리사가 된 친구입니다. 주변에서 다들 말렸죠. "나이도 있는데 미쳤어?" "안정적인 직장 왜 버려?" 하지만 그 친구는 피하지 않았어요.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향해 걸어갔죠. 지금은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그건 그 친구의 '운명'이에요. 하지만 하늘이 정해준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죠.
반대로 피한 것들도 운명이 됩니다. 20년 전 유학을 포기한 그분처럼요. 그것도 운명이에요. 피할 수 있었던 도전을 피했고, 그 선택이 지금의 삶을 만들었으니까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거죠.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선택 앞에서 많이 망설이더라고요. 너무 많은 정보 때문일까요. 모든 선택의 결과를 미리 알고 싶어 해요. 실패하지 않으려고, 후회하지 않으려고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긴 하지만요.
중요한 건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선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거예요. 잘못된 선택이라고 느껴지더라도, 그 선택을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면 그것도 의미 있는 운명이 되니까요. 피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용기거든요.
최근에 한 수강생이 물었어요. "그럼 선생님, 모든 걸 다 시도해봐야 하나요? 무리하면서까지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순간을 알아보는 거예요. 내 가슴이 뛰는 걸 느낄 때,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그 순간을 말이죠."
운명이란 별에 새겨진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지는 거예요. 매 순간 우리가 내리는 선택들이 모여서 운명이 되는 겁니다.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던 것들, 두려웠지만 도전했던 것들, 불확실했지만 믿고 나아갔던 것들. 그것들이 바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선택 앞에 서 계신가요? 피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부딪쳐보고 싶으신가요?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 될 겁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피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보다, 피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자부심이 훨씬 오래 남는다는 것을요.
오늘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선택 앞에 서 있습니다. 작은 선택도 있고 큰 선택도 있겠죠. 그중에서 무엇을 피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