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니언스(Reminiance) 대기실
윤서하는 사랑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레미니언스 62층 대기실의 백색 조명은 차가웠다. 은색 벽면에 반사된 빛이 눈을 아프게 했지만, 서하는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무릎 위에 올린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가 쪽 중년 남자는 허공을 응시한 채 입술을 씹고 있었다.
트라우마일까. 맞은편 젊은 여성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눈물을 닦았다.
범죄 피해자처럼 보였다.
복도 끝 노인은 낡은 사진을 쥐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를 잃은 사람일 것이다.
2042년, 기억은 더 이상 짐이 아니었다. 지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를 지우면 다시 숨 쉴 수 있을까?'
서하는 가방 안 접힌 휴지를 만졌다. 여기 오기까지 세 번이나 울었다.
지하철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리고 대기실 문 앞에서.
이제 그만 울고 싶었다. 아니, 아예 느끼고 싶지 않았다.
"86번 윤서하 님, 3번 상담실로 들어오세요."
AI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하는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
상담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서하의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석양빛 속에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셔츠를 입은 그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홀로그램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
짙은 갈색 머리,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무엇보다—감정이 지워진 듯한 무표정.
"앉으십시오."
짧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는 여전히 서하를 보지 않았다.
서하는 의자에 앉았다. 차가운 가죽이 등을 통해 스며들었다.
남자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름표에는 '한도윤 / Lv.9 편집사'라고 적혀 있었다.
도윤의 눈은 깊고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오래전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의뢰 내용을 말씀하세요." 도윤이 말했다.
서하는 가방 끈을 쥐었다. 입술이 바싹 말랐다.
"저는... 연인을 잊고 싶어요."
"이유는?"
"너무 아파서요."
서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울면 안 된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계속 생각나서...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요. 거리에서 비슷한 뒷모습만 봐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서..."
"지우고 싶으시군요."
도윤의 목소리에는 어떤 온기도 없었다. 그는 서하의 눈을 봤다. 정확히 3초.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기억 편집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감정을 봉인하면 그 사람과 관련된 모든 느낌이 사라집니다. 사랑도, 그리움도, 심지어 이름을 들어도 아무런..."
"괜찮아요." 서하가 끊었다. "그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요."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그램 화면 위를 떠돌았다.
"알겠습니다. 스캔을 시작하겠습니다."
......................
도윤이 서하에게 헤드셋을 건넸다.
실버 메탈 재질의 기기는 차갑고 묵직했다. 서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머리에 착용했다. 측두부에 밀착되는 센서가 미세하게 따가웠다.
"눈을 감으십시오. 지우고 싶은 사람을 떠올리세요."
서하는 눈을 감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던 모습, 손을 잡아주던 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등을 돌리던 뒷모습까지.
서하의 눈꺼풀 안쪽에서 눈물이 맺혔다.
도윤 앞의 홀로그램 화면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검은 배경 위로 파동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작고 푸른 물결이었다. 하지만 곧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붉은색으로 변했다.
파동이 격렬하게 출렁였다. 화면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었다.
"감정 코드 과다 검출. 위험 수준입니다."
AI의 경고음이 차갑게 울렸다.
도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화면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데이터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사랑, 그리움, 절망, 분노—온갖 감정 코드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화면 한가운데, 암호화된 이름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감정 대상자 이름 복호화 중...]
[대상자: 한도윤]
도윤의 눈이 커졌다.
......................
도윤의 오른손이 떨렸다.
미세했지만, 확실했다. 그는 재빨리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시선은 화면에서 떼지 못했다.
'한도윤.'
자신의 이름이었다.
서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헤드셋 아래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도윤은 급히 화면을 껐다.
"윤서하 씨."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서하가 눈을 떴다.
"왜 그러세요? 문제라도...?"
"아닙니다." 도윤이 잘라 말했다. "시스템 점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네? 하지만..."
"다음 예약은 데스크에서 잡으시면 됩니다."
도윤은 더 이상 서하를 보지 않았다. 그는 헤드셋을 회수하고 의자를 돌렸다. 서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문이 닫혔다.
도윤은 혼자 남았다.
상담실은 고요했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다시 화면을 켰다. 서하의 감정 코드가 여전히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명하게 박힌 이름.
한도윤.
"왜...?"
그의 속삭임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도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단단한 심장.
오래전 멈춘 것 같던 그 안에서, 무언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내 이름이 뜨는 거지?
나는 저 여자를 아는가?
화면 속 붉은 파동이 고동쳤다. 마치 누군가의 심장처럼.
[다음 화에 계속]
### 시스템 개요
- 기업명: 레미니언스(Reminiance)
- 슬로건: “기억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 기술 기반: 감정 코드 분리 기술(ECS, Emotional Code Separator)
- 기억은 ‘사실 데이터’와 ‘감정 코드’로 분리됨.
- 감정 코드를 삭제하면 기억은 남지만 감정이 사라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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