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의 기억

by 수담

자정이 넘은 레미니언스는 고요했다.


한도윤은 어두운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이 홀로그램 화면에 반사되었다.


그는 손가락을 화면 위에 올렸다. 떨림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윤서하.'


오늘 만난 여자의 이름. 그리고 그녀의 감정 코드 한가운데 박혀 있던 자신의 이름.


도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서하의 파일에 접근했다.


[접근 권한 필요 / Lv.9 이상]


권한은 있었다. 하지만 이건 명백한 규정 위반이었다. 담당 편집사라도 상담 종료 후 의뢰인 파일을 열람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도윤의 손가락이 인증 패널 위에서 멈췄다.


'알아야 한다.'


그는 지문을 찍었다.


파일이 열렸다. 서하의 기본 정보가 떴다. 이름, 나이, 직업. 그 아래로 과거 상담 기록이 나타났다.


[2039.03.15 / 초회 상담 / 담당 편집사: 한도윤]


도윤의 눈이 그 줄에 고정되었다.


[의뢰 내용: 감정 복원 실험 / 상태: 진행 중]


"내가... 그녀를 담당했다고?"


말이 되지 않았다. 3년 전의 일이라면 기억해야 했다. 하지만 도윤의 머릿속에는 윤서하라는 이름과 관련된 어떤 기억도 없었다.


그는 계속 스크롤을 내렸다. 기록은 4개월간 이어졌다. 주 2회 상담, 감정 복원 시도, 경과 보고서. 그리고 마지막 기록.


[2039.07.18 / 최종 상담 / 결과: 실패 / 비고: 감정 폭주로 인한 혼수상태]


도윤의 손이 멈췄다.


......................


도윤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백업 서버. 삭제된 감정 코드가 보관된 곳. 법적으로는 10년간 보관 의무가 있지만, 실제로는 영구 저장되었다.


기억은 지워져도 데이터는 남는다.


그는 서하의 감정 코드 파일을 열었다.


화면이 붉게 물들었다. 3년 전 봉인된 감정들이 파형으로 나타났다. 사랑의 감정 코드—핏빛 파동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진폭이 너무 컸다. AI 경고 치를 훨씬 넘는 수치였다.


'이 정도면... 살아남은 게 기적이야.'


도윤의 시선이 암호화된 영역으로 향했다. 감정 대상자의 이름. 일반적으로는 공개되지만, 특수한 경우 암호화된다.


담당 편집사가 요청했을 때, 혹은 시스템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을 때.


도윤은 관리자 권한을 사용했다.


[복호화 시작]


화면에 문자가 한 글자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ㅎ...

ㅏ...

ㄴ...


도윤의 심장이 빨라졌다.


ㄷ...

ㅗ...

ㅇ...


[복호화 완료]

[감정 대상자: 한도윤]


"이게... 무슨..."


도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면이 흔들렸다. 아니,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3년 전, 윤서하는 자신을 사랑했다.


그리고 도윤은 그녀를 담당한 편집사였다.


그렇다면 왜 기억나지 않는가?


......................


순간 두통이 찾아왔다.


도윤은 머리를 감쌌다.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눈을 감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 도윤아, 오늘 날씨 좋지 않아?


여자의 목소리였다. 밝고 따뜻한 목소리.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묘하게 익숙했다.


도윤은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 편집사님, 오늘도 실험할 거예요?

— 괜찮아요. 전 당신을 믿어요.


같은 목소리였다. 윤서하의 목소리일까?


도윤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려 했다. 얼굴이 나타나려는 순간, 영상이 깨졌다. 마치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흐릿하게 번졌다.


"으윽..."


통증이 심해졌다. 도윤은 책상을 짚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왜 기억이 이렇게 파편화되어 있는가?


왜 얼굴은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픈가?


도윤은 알고 있었다. 이런 증상은 한 가지 경우에만 나타났다.


감정 봉인.


자신의 기억이 편집되었을 때.


......................


"밤늦게 뭐 하세요, 한 편집사?"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 서한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단정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차가운 표정, 흔들림 없는 시선.


"서 관리자."


"백업 서버에 접속했네요." 한비가 한 걸음 다가왔다. "윤서하. 오늘 상담한 의뢰인이죠?"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

한비는 그의 화면을 보았다. 암호화가 풀린 이름, 붉은 감정 코드, 그리고 과거 기록들. 그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의뢰인..." 도윤이 입을 열었다. "과거에 내가 담당했던 사람인가요?"


한비는 잠시 침묵했다.


"기록상으로는 요."


"하지만 난 기억이 없습니다."


"그렇겠죠." 한비가 말했다. "당신은 기억 못 하잖아요."


"무슨 뜻입니까?"


한비는 도윤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한도윤 편집사. 당신은 3년 전, 스스로 감정 봉인을 요청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시술을 집행했죠."


도윤의 눈이 커졌다.


"... 뭐라고요?"


"당신이 선택한 거예요. 윤서하와 관련된 모든 감정을 지우겠다고." 한비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당신은 그녀를 사랑했어요. 그리고 그 사랑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 지워버렸죠."


도윤은 뒤로 물러났다. 등이 책상에 닿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내가 의뢰인을 사랑한다는 게..."


"규정 위반이죠. 알아요." 한비가 말을 끊었다. "그래서 당신은 견딜 수 없었던 거예요. 편집사가 의뢰인을 사랑하는 것도, 그 사랑 때문에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 것도."


"내가 그녀를... 위험에?"


한비는 도윤의 화면을 가리켰다.


"2039년 7월 18일. 윤서하는 당신의 감정 복원 실험 중 감정 폭주로 혼수상태에 빠졌어요. 일주일간 의식을 잃었죠. 당신이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실험을 무리하게 진행했기 때문이에요."


도윤의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그 후로 나흘 뒤, 당신은 저를 찾아왔어요." 한비의 목소리에 미세한 감정이 스쳤다.


"'내 감정을 지워달라'라고. '그녀를 볼 때마다 너무 고통스럽다'라고."


도윤은 한비를 밀치고 자신의 개인 파일에 접근했다.


손이 떨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한도윤 / 개인 기록]

[2039.07.22 / 감정 봉인 시술]

[담당: 서한비 / 봉인 감정: 사랑 / 대상자: ███]


도윤은 암호를 풀었다.


세 글자가 나타났다.


[대상자: 윤서하]


화면이 흐려졌다. 아니, 도윤의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책상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던 거지?"


그의 속삭임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비는 그런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면 속 붉은 감정 코드가 여전히 파동치고 있었다. 지워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사랑.


봉인되었지만 여전히 고동치는 심장.


[다음 화에 계속]


#SF로맨스 #기억상실 #재회로맨스 #근미래 #감정미스터리 #운명적사랑 #힐링웹소설 #완결웹소설 #12화완결 #먹먹한로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