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 여자는 윤서하가 아니었다.
아니, 얼굴은 분명 그녀였다. 긴 생머리, 큰 눈, 부드러운 인상.
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유리구슬처럼 투명하고 공허했다.
서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만졌다.
차갑다.
손끝이 피부를 스치는 감촉만 있을 뿐, 그게 자신의 뺨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됐다.
커피 잔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입술에 댔다. 뜨겁다. 삼켰다. 쓰다.
그게 전부였다.
예전에는 이 커피를 마시면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 살아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은? 그저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갈 뿐.
음악을 틀었다. 좋아하던 노래. 가사를 다 외울 정도로 들었던 곡. 스피커에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귀에는 들렸다.
하지만 가슴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마치 방음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처럼 멀고 낯설었다.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밝다. 따뜻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정상인가?"
서하는 중얼거렸다.
기억을 지운 건데, 왜 나까지 사라진 것 같지?
그 사람의 얼굴은 잊었다. 이름도, 목소리도, 함께했던 시간도 전부 지워졌다. 그런데 왜. 왜 세상 전체가 색을 잃은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
가슴 한가운데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
"기억을 지웠는데 왜 더 이상한 거죠?"
서하는 레미니언스 상담실 문을 열자마자 쏟아냈다.
"전 제가 아닌 것 같아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맛도, 기쁨도, 슬픔도. 그냥... 텅 비어있어요."
한도윤은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책상 위 홀로그램 화면을 켰다. 서하의 기록이 떠올랐다.
"부작용입니다."
"부작용이요?"
"감정 손실 증후군. 봉인한 감정 외에도 다른 감정이 둔화될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평온했다. 마치 날씨를 설명하듯.
서하의 손이 떨렸다.
"그럼... 다시 돌릴 수 있나요? 제 감정을 되돌릴 수 있어요?"
0.5초.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도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입술이 열리려다 닫혔다. 손가락이 책상 위에서 경직됐다.
"...불가능합니다."
"지금 망설였죠?"
서하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분명 뭔가 있는 거 아니에요? 방법이 있는데 말 안 하는 거죠?"
"규정상 봉인된 감정은 복원할 수 없습니다."
"규정이요? 규정 때문에 제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화면을 내리며 시선을 피했다.
서하는 그를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일어섰다.
문 앞에 섰다. 손이 문손잡이에 닿았다. 열기 직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편집사님."
"..."
"당신 눈도 저랑 똑같네요."
문이 닫혔다.
도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밤 11시 42분.
레미니언스 62층 편집실에는 도윤만 남아 있었다.
그는 헤드셋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은빛 메탈 재질. 차갑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
불법이다.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스캔하는 것. 봉인 기록에 접근하는 것. 모두 Lv.9 편집사라도 허용되지 않는 행위.
하지만 손은 이미 헤드셋을 머리에 씌우고 있었다.
차갑다.
관자놀이에 닿은 센서가 미세한 전류를 흘려보낸다.
화면이 켜졌다.
[역 스캔 시작]
[대상: 한도윤 / 접근 권한: 승인됨]
붉은 파동이 화면을 채웠다. 아니, 파동이 아니었다. 깨진 조각들이었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 파편처럼 흩어진 기억의 잔해들.
그리고 그 속에서.
"서하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목소리. 하지만 낯설었다. 이렇게 따뜻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미안해..."
화면이 깜빡였다.
"난 네가..."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깨진 파편. 복원 불가. 감정 코드 손상.
"으윽..."
도윤의 머리가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관자놀이를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 뇌를 짓누르는 무게. 손등에 땀이 맺혔다.
헤드셋을 벗어던졌다.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헤드셋이 둔탁한 소리를 냈다.
도윤은 책상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금속 표면. 떨리는 호흡.
"왜... 이렇게 아픈 거지?"
기억이 없는데. 감정이 봉인됐는데. 왜 가슴이 이렇게 조여 오는 거지?
화면 속 파편들이 천천히 사라졌다.
마지막 문장만 남았다.
[봉인 대상: 윤서하]
......................
퇴근길.
도윤은 습관처럼 그 카페 앞을 지나고 있었다. 63번가 모퉁이. 검은 간판. 따뜻한 조명.
문을 열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녀가 보였다.
윤서하.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식은 커피.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도윤의 발이 멈췄다.
서하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3초간의 침묵.
"앉으세요."
서하가 먼저 말했다. 도윤은 망설이다 그녀 맞은편에 앉았다.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다시 침묵.
서하가 커피 잔을 돌렸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도자기 표면.
"편집사님."
"..."
"당신은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기억을 지운 적 있나요?"
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하가 작게 웃었다. 슬픈 웃음이었다.
"있으시죠. 눈빛이 저랑 똑같아요."
"..."
"텅 빈 사람의 눈이에요."
도윤은 그녀를 바라봤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비췄다. 부드러운 곡선. 긴 속눈썹. 살짝 처진 어깨.
묘하게 익숙했다.
언제 본 적이 있는 것처럼. 아니, 언제 이렇게 오래 바라본 적이 있는 것처럼.
가슴 한쪽이 아렸다.
손이 움직였다.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뻗어졌다.
그녀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공중에서 멈췄다.
도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떨리고 있었다.
왜 자꾸... 이 사람을 보게 되는 거지?
왜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 거지?
그리고.
왜 이렇게 아픈 거지?
[다음 화에 계속]
#SF로맨스 #기억상실 #재회로맨스 #근미래 #감정미스터리 #운명적사랑 #힐링웹소설 #완결웹소설 #12화완결 #먹먹한로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