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달 Aug 16. 2023

선례가 없는 일: 백지에 점찍기

선례가 없는 일은 백지에 점을 찍는 것과 같다. 고작 점 하나라 생각하면 안 된다. 중앙에 찍으면 되나? 한쪽 귀퉁이에 찍으면 될까?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두렵다. 참고할 매뉴얼이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어서 더 많이 고민하고 경험과 감을 총동원해 발을 내디뎌야 한다. 또 고민의 양과 깊이와 상관없이 다가올 시행착오를 각오하고, 삐걱거린다 싶으면 기다렸다는 듯 치고 들어오는 부정적인 시선도 별거 아닌 듯 넘길 쿨함도 필요하다. 구구절절한 과정에 비해 결과는 그리 거창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물론 감내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발상의 가치나 고민 가득한 과정을 평가하는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백지에 점을 찍는다. 새로운 생각을 하고,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지지부진한 과정을 돌파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선례가 없는 일을 해야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떤 기준으로 점을 찍어야 할까? 사업을 기준으로 예를 들어보자. 실무자 입장에서는 사업의 세부내용을 꼼꼼하게 구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다. 새로운 사업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런데 결정권을 지닌 사람들은 이 사업이 '무엇'인지 보다 '왜'에 관심이 많다. 선례가 없는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질문은 '그게 뭔데' 보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다. 그래서 선례가 없는 일을 '보고'하려고 할 때는 그 일로 인해 변화될 상황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내는 데 좀 더 무게중심을 두는 게 좋다. 해당 사업을 수행하는 기간이나 필요 인력, 비용, 구체적인 사업 내용 보다 그 일로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내고 싶은지,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말이다.


가령 생성 AI를 우리 회사 업무에 적용하려고 한다고 하자. 정형화된 문서작업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개발하려고 한다.


기획자는 개발하려는 서비스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문서요약, 일일보고 업무 초안 작성 등), 어떤 방식으로 구동되는지(서버나 개발비용, 회사 내 기존 시스템과 연동방법 등)를 꼼꼼하게 준비해야 한다. 결국 '무엇'을 고민하는 시간과 깊이가 '사업기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선례가 없는 '사업기획을 보고'할 경우에는 다르다. 이 사업을 '왜' 해야 하는지 결정권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촘촘한 사업기획은 무용지물이 된다. AI를 적용하면 단순반복적이고 정형화된 업무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 창의적 업무에 좀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건 곧 비용을 줄이고 추가적인 성과 달성에 도움을 크게 줄 것이라는 취지의 논리를 보고서 문두에 강조하는 게 좋다. 구체적인 내용을 적을 때도 사업의 도입 전과 도입 후의 모습을 as is-to be로 도식화하는 게 좋다. 선례가 없는 일일 수록 구체적으로 와닿는 효과를 떠올릴 수 있도록 표현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두루뭉술하거나 추상적인 비교로는 객관적으로 득실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업을 기획'하는 것과 '기획된 사업을 보고'하는 것을 구분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