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나의 불행지수는 10을 기준으로 9.9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날마다 절망하고 좌절하다 종국에는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런데 그 죽음이라는 것이 결국은 절망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관념에 불과했다는 것을 지금은 안다. 일기장에 죽고 싶다를 밥 먹듯 써댔으면서도 시도할 엄두는 내지도 못했고 소리 죽여 우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려 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단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 불행에 대한 거부 반응이었으며 스스로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삼으려는 감상적 행동이었다. 난 크놀프처럼 절규했고, 라스꼴리니코프의 정의를 내 것으로 여겼다. 빨간 머리 앤의 긍정을 받아들였다면 그 시절이 덜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때의 나에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과 같았다. 타인에겐 부러움의 대상이고 충만한 자유를 맘껏 누리고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이방인.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방인은 나였다. 혼자만의 테두리에 갇혀 절망하다 결국은 불행과 한 몸이 되어 주위의 불행까지 끌어모았던 내가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 인생은 내용이 풍성한 소설처럼 쉽게 쓰일 줄 알았다.
그런데,
'어라? 이게 아닌데.'
내 인생은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시절을 글로 쓰려는데 걸어온 길을 한참 동안이나 되돌아가야 했다. 그런 후에 만나게 된 절망마저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 역시 평범하다 여긴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 삶을 살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눈물 마를 날이 없었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리면 그 말이 모순되는 건 분명하다. 눈물이 기쁨에 겨워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해 흘린 것만이 아니라면 나의 눈물은 본연의 의미에 충실한 울분이 쏟아낸 슬픔이었다. 그런데 그 서러운 삶을 불행과 관련 없는 평범한 삶이라 말하는 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어렸다. 나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직장 생활을 하며 수입을 만들고 있는 사람인 것에 반해 과거의 엄마는 직장 생활이 뭔지도 모른 채 그저 집안일에만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모든 경제적 책임을 떠안은 채 세상에 던져졌다. 제 몸 하나도 건사할 수 없는 처지에 아이들까지 부양하게 된 것이다.
엄마는 아빠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갈 용기도 없었다. 날마다 찾아오는 내일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도 몰라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고민하기 전에 그런 상황을 외면하려 고개를 돌렸다. 무능력으로 자신을 감싸버린 엄마 때문에 우리 남매는 친가로 외가로 흩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엄마가 정신을 차렸다. 권정생 선생님의 '엄마 까투리'에서 불을 피해 본능적으로 날아올랐던 엄마 까투리가 결국에는 아이들을 안은 채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엄마도 우리를 안은 채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다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엄마가 돌아온 것은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예고된 나의 미래에는 뜨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는 나의 미래를 결정짓고 있었다.
"왜 엄마 마음대로 내 학교를 결정하는데? 왜 나와 동생을 차별하냐고?"
엄마가 우리를 아무 데도 보내지 않고 함께 살기로 결정한 것에 감사했던 마음은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부모로서 엄마가 해야 할 일을 언급하고 있었다. 부모는 차별 없이 자식을 사랑해야 하고, 그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그런데 엄마는 동생을 위해 나를 희생시키고 있었다.
동생과 나는 연년생이다. 정확히 말하면 2살 차이가 났지만 동생이 7살에 학교를 들어간 바람에 학년으로 연년생이 되어버린 거다. 동생은 남자고 나는 여자다. 요즘의 젠더 구분은 차별의 다른 이름이 되었지만 나의 사춘기 시절(80년대)은 유교 사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시기였기에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교육을 받고 있었음에도 선택의 상황에선 늘 남자에게 밀렸다. 나의 엄마도 그랬다.
엄마는 동생을 위해 나의 교육권을 박탈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는 시험으로 고등학교가 결정되었다. 고등학교에 서열이 있었던 것이다. 뺑뺑이라 불리는 요즘의 추천방식과는 확연히 달랐다. 물론 요즘에도 지망 순위가 있기는 하지만 시험을 봐서 그 학교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시험을 봤고 그 점수로 고등학교를 결정했다.
나는 시험을 잘 봤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학교에는 가지 못했다. 엄마가 3년 장학생이라는 혜택에 나를 외삼촌이 있는 학교로 보내버린 것이다. 외삼촌의 학교는 성적에서 밀린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학교였다. 그래서 내 성적이면 3년 장학생도 충분했던 거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빠도 없는 내가 내세울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다 생각했는데 엄마가 그걸 막은 것이다.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하루하루가 눈물이 된 것은.
난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아이처럼 행동했고, 밤이면 일기를 쓰며 울었다. 서러웠다. 나보다 똑똑했던 동생도 미웠다. 그 애가 남자였다 해도 공부에 재주가 없었다면 집안의 기둥 운운하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은 공부에 뛰어났고 그에 미치지 못한 나는 탈락되었다.
그런데 정작 학교 생활이 나쁘지 않았다. 나를 울게 만들었던 학교였지만 그런 학교를 스스로 선택해서 온 성적 좋은 애들이 있었고, 시험을 망쳐 예상치도 않게 만나게 된 친구도 있었다. 학교는 그냥 학교일 뿐이었고 명문고였다면 대접받지 못했을 나의 성적도 나를 발전시키는 동기가 되어주었다. 불행이 눈물에 씻겨 맑고 깨끗하게 정화된 기분마저 들었다. 선택의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난 대학을 갔고 또 다른 인생을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