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은 나의 결혼기념일이다. 11과 22. 숫자의 조합도 좋아 외우기도 쉬운 날이다.
그런데 남편은 이날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해마다 뒷북을 친다. 잔치는 끝났는데 혼자서 풍악을 울리니 뻘쭘할 만도 한데 남편은 늘 이 일을 반복한다.
스마트폰에 등록해서 기억할 수는 없나? 내가 달력에 동그라미를 해서 날짜를 상기시켜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다. 최소한의 나의 자존심이다. 혹시나 하는 믿음인지도 모른다.
그럼 그렇지, 그래야 내 남편이지. 올해도 역시 나를 실망시키니 힘이 빠지고 의욕이 사라진다.
아침부터 우울한 기분에 홈쇼핑을 들여다봤다. 나를 위해 선물 하나를 골랐다. 카드가 아닌 현금 구입이었다. 카드는 남편 이름으로 된 가족 카드이니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순전히 남편과는 무관한 나만의 선물을 사고 싶은 것이다.
'그래, 남편이 기억하지 못하면 어때? 내가 기억하고 이렇게 축해해 주면 되는 것이지.'
마음이 허해지면 쇼핑을 한다는데 맞는 말인 것 같다. 지금 나의 마음은 허하다 못해 구멍이 뻥 뚫려 싸늘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으니 말이다.
달리 생각해 보면 결혼기념일을 남편처럼 생각하면 기분 나쁜 일도 없을 것 같다. 남편은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지 않으니 나에게서 선물 따위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며 하루를 망치는 일 따윈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뭔가? 결혼기념일을 기억해서 하루를 망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결혼기념일은 기억하는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게임이 된다. 그럼 나도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지 말아야 하나?
그건 또 아니다. 결혼기념일은 말 그대로 결혼을 기념하는 날이다. 우리의 결혼은 남편에겐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결혼을 해서 남편은 많은 것을 얻었다. 자신의 아이를 낳아줄 아내를 얻었고,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며느리를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한다고 할 때 나는 시집을 갔다. 그래서 나는 결혼기념일에 더 큰 의미가 있는 남편이 결혼기념일은 꼭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편은 올해도 결혼기념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난 아무에게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하지 않은 채 저녁에 케이크를 하나 사들고 집엘 갔다. 일종의 시위처럼 말이다.
난데없는 케이크에 아들은 무슨 날이냐고 물었고, 나는 대답 대신 아빠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눈치 빠른 아들은 날짜를 보고 남편에게 가서 오늘이 결혼기념일임을 알려준 모양이다. 남편은
"미리 얘기를 좀 해주지 그랬어? 미안해서 어찌하나?"며 장난스럽게 애교를 부렸다.
나는 남편의 그런 장난스러운 태도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애교를 받아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나 역시 아무 일 없는 듯 "됐다고" 하며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입을 닫아 버렸다. 그랬더니 얼굴까지 굳어졌다. 밥은 먹었으나 케이크는 뜯지 않았다. 나의 냉랭한 태도에 남편도 기분이 나빴던지 얼굴이 굳어졌고, 입도 닫혔다.
일순간에 집안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이렇게 집안 분위기를 망칠 의도는 아니었는데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사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어서 입을 열지 않았더니, 나의 결혼기념일은 그렇게 침묵 속에서 죄인처럼 시무룩하게 지나가고 말았다.
역시나 나의 결혼기념일은 결혼 다음날이었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남편이 꽃 바구니를 사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 분위기를 전환시킬 기회가 온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며칠간은 또 굳은 얼굴로 생활해야 한다.
나는 웃어주었다.
"고마워~." 고마움도 표시했다.
앞으로도 나의 결혼기념일은 계속 이런 식이 될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이 스스로 결혼기념일을 기억해서 나의 결혼기념일 11월 22일, 제 날짜를 찾아줄 때까지 어떤 방법도 쓰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그날이 당장 내년이 되는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지만 십 년이 걸리는 인내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