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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n 16. 2020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말은 틀린 말이다.

장례식장을 다녀와서 시아버지를 생각하다.

죽음을 대하는 냉정한 자세


늦은 시간,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내용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내용일지 대강은 짐작이 갔다. 터치를 하여 확인을 하니 역시 나의 예상이 맞았다. 친구의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결국은 가셨구나, 돌아가신 분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잘 된 일이야'


무례하게도 문자를 받고 맨 처음 들었던 생각은 가신 분에 대한 안타까움보단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일주일 전 그 친구는 시어머니의 다리 수술을 위해 이곳으로 내려왔었다. 평소 시아버지의 간병 때문에 다리가 아프신데도 수술을 받지 못하셨던 친구의 시어머니께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통증 앞에 남편의 간병을 잠시 멈추고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가 수술을 할 동안에는 시아버지를 돌봐 드릴 수가 없었기에 시어머니께선 시아버지를 요양 병원에 입원시키셨고, 친구가 내려올 당시 시아버지께선 요양 병원에 입원해 계신 상태였다.


그렇게 친구가 시어머니와 수술할 병원을 알아보고 다닐 때 느닷없이 요양 병원으로부터 시아버지가 급성 폐렴으로 위험하니 어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연락에 시어머니의 수술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아버지의 요양병원으로 향했고, 급한 대로 근처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병원에서는 하루 이틀이 고비라며 지켜보자는 말을 했단다. 


그 후 친구에게선 아무 연락이 없었기에 난 그분의 건강이 괜찮아지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딱 일주일 만에 저런 내용의 연락이 온 것이다. 나이드신 분들께 폐렴이 무섭다는 것을 시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로 느꼈다.


친구는 코로나의 위험성도 있고 하니 조문은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원에 가기 전에 들를 시간이 있었기에 다음날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른 시간에 찾아간 탓인지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익숙치 않는 장소에서의 행동은 늘 부자연스럽다. 그 낯섦이 싫어 친구의 얼굴만 보고 나오려 했는데 부조금을 내는 장소가 너무 안쪽에 있어 어쩔 수 없이 빈소에 들러 인사를 해야 했다. 친구의 시댁 식구들과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밖으로 나와 친구와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자신의 시아버지께서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친구가 윗 지방으로 이사를 가기 전 시아버지의 병원 담당은 친구의 몫이었다. 건강 염려증이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건강을 챙기셨던 친구의 시아버지께선 병원에 갈 일이 있을 때면 늘 친구를 불렀고, 친구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인양 시아버지의 운전기사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병원을 자주 찾은 덕분인지 시아버지께서는 뇌에 있던 이상을 일찍 발견하셨고, 다행히 수술도 빨리 받았다. 그런데 뇌수술을 받고 나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셨다.


거기다 친구까지 이사를 가는 바람에 시아버지의 간병은 시어머니께서 도맡아 하셨는데 간병인을 쓰는 것조차 거부하신 시아버지 탓에 시어머니마저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며 친구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간병인도 요양 병원도 원치 않는 시아버지를 원망했는데 저렇게 갑자기 돌아가시니 그 마음이 너무도 죄송스러워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란 말은 옳지 않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돌아가신 나의 시아버지가 떠올랐다. 생전에 나의 시아버지께서도 자신은 절대 요양 병원엔 들어가지 않으실 거란 얘기를 종종 하셨다. 아버님께선 요양 병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행위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생각이다. 요양 병원에 부모를 모시는 것은 결코 부모를 외면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하는 자식은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의 간병을 할 수는 없다. 치매와 같은 병은 가족의 힘만으론 감당하긴 어려운 병이다. 이런 경우는 요양 병원이나 타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다행히 나의 시아버지께선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시지 않으셨기에 시험에 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식의 입장에선 감사할 노릇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요즘은 돌아가신 시아버지에 대한 서운했던 마음도 거의 사라졌다.


나의 시아버지께선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시어머니만을 생각하셨던 분이셨다. 그때는 그 마음이 서운해 시아버님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며느리인 나는 시아버지의 사랑을 기대할 필요가 없었던 거다. 부부에게는 서로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를, 시어머니는 시아버지를. 남편은 나를, 나는 남편을.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만 사랑하면 됐던 것이다.


그때는 시아버지께서 시어머니를 위해 시켰던 모든 일들을 시집살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어머니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같이 사는 동안에는 보이지 않았던 마음이 멀리 떨어져 바라보니 이해가 되었다. 이것이 가까이서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제는 좀 더 느긋한 마음으로 한 발짝 떨어진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봐야겠다. 그러면 세상이 더 넓게 제대로 보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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