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취미 생활이 준 교훈

시작의 때(時)는 정해지지 않았다.

by 은빛구슬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가


*오~매 단풍 들것네 했더니 어느새 그 단풍이 바람을 타고 춤을 춘다. 빨갛게 노랗게 세상을 물들이며 온기를 전하려는 단풍의 포근한 마음을 심술궂은 바람이 외면해 버린 쓸쓸한 가을이다.


그 쓸쓸함이 싫어서였을까? 작년 이맘때쯤 난 시어머니의 취미 생활을 질투한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어머니께서 우아하게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는 동안 나는 육아로 살림으로 힘들었다는 내용을 마구 쏟아내면서 말이다. 그런데 1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난 시어머니의 취미 생활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쌓여가는 어머님의 그림과 늘어가는 실력을 보며 나의 속좁음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소멸을 준비하는 계절이자 수확의 계절이다. 끝나가는 한 해를 마무리하러 가기 전에 그동안 노력하며 살아온 삶의 대가를 얻어가는 계절이란 뜻이리라. 그런데 얻을 것이 없는 가을은 소멸만을 준비해야 하니 그 쓸쓸함이 더 크게 드리워질 수밖에 없다. 아마도 작년 나의 가을이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 그렇게 쓸쓸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을 테고.


지금까지도 어머니께선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여전히 취미로 그림을 그리신다. 스스로 방법을 터득해가며 그리시는데 한 번씩 내려오는 딸이 잠깐이라도 봐주면 몰라보게 달라진 솜씨를 보이신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남편이


"근처 학원에라도 다니면서 정식으로 배워보는 건 어때요?"라고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께선


"솔직히 내 나이가 70살만 돼도 무슨 일이든 도전해보겠다. 그런데 낼모레가 90인 사람이 뭘 시작하겠냐. 그저 지금처럼 남의 그림이나 흉내 내면서 즐겁게 사는 거지. 만약 니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정식으로 배웠다면 지금쯤 전시회라도 열었을지 모르지. 그때는 그 나이가 무엇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 생각해 엄두를 못 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가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나이였던 거 같다." 하시며 지난 세월을 아쉬워하셨다.


"어머니께선 100세 인생이란 말도 못 들었어요. 어머니께서 100살이 되시려면 10년도 넘게 남았는데 늦긴 뭐가 늦어요? 배우고 싶으시면 말씀만 하세요 등록해드릴게"

"아이고, 듣기도 싫다. 100세 인생이고 뭐고 100살까지 산다는 말은 하지도 마라.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머니께선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나이를 70세로 잡으셨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10년이 지난 후에 다시 과거를 돌아보신다면 그땐 어떤 말씀을 하실까? 혹시 지금 시작하지 않았음을 후회하고 계시지는 않으실까?


세상 누구에게나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시기가 똑같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20대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을 보고 30대의 사람은 좌절을 하며, 자신은 시작할 시기를 놓쳤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40대에 무엇인가를 시작한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성실히 나가는 모습을 본다면 자신에겐 아직 시작의 시기가 남았음을 깨닫고 새롭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이렇듯 시작의 빠르고 늦음이 존재하는 인생에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과의 비교만으로 삶을 비관하며 산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느 누구라도 자신이 무엇인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었다고 한탄해서는 안 된다. 어떤 개그맨이 우스갯소리로 말한 늦었다고 생각한 때를 가장 늦은 때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생각을 했다는 자체를 변화의 시점으로 보고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 시기를 일을 시작하는 시작점으로 보라는 말이다.


나는 내 나이를 쓸쓸한 가을이라 생각했다. 씨를 뿌리는 봄은 지나가 버렸고 이제는 거두는 일만 남은 가을인데 거둬 들일 것이 적으니 쓸쓸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늦은 나이에 꿈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시작으로 성공의 열매를 맛본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가까이에는 어머님이 계셨다.


어머니께서 안타까움에 말씀하신 시작의 시기는 지금의 나에겐 까마득히 먼 훗날이다. 그 날이 되기 전에 나에게 주어질 무궁무진한 기회를 생각하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그 귀한 기회들을 그저 눈으로 바라만 보고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너는 지금 잘 살아가고 있니? 계절이 나에게 묻는다. 그 쓸쓸함에 기대어 대답한다. 무엇인가 이루려는 꿈이 있고 그 꿈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가고 있으니 잘 살아가고 있다고.


나의 시작이 너무 늦지는 않았는지 걱정을 했는데 어머니의 말씀에 아직 어린 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하며 지내냐를 생각하면 사람들에게 늦은 나이란 없다. 그래서 올해 나의 가을은 작년보단 덜 쓸쓸하다.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하면 나의 나이는 가을이 아니었다. 씨를 뿌려야 하는 봄이었다.





*김영랑의 시 '오매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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