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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r 26. 2021

동생보다 선생님이 더 미워요

너는 사랑이 필요한 어린애였어.

 딸랑딸랑,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다. 학원 출입문에 달린 풍경 소리다. 출입 문의 풍경은 수업을 할 때 누군가 방문하면 신속하게 내다보기 위한 나만의 장치였다. 수업은 시간대 별로 이루어지기에 수업 시간에 문이 열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였을까 그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강의실에서 나가 보니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서 있다. 수업하는 날이 아닌데 웬일인가 싶다.


 "영이야, 무슨 일이야? 너 지금 영어 학원에 있을 시간 아냐?"

아무 말이 없다.

 "화장실 갔다 왔으면 어서 수업 들어가. 영어 선생님 화내신다"

빵빵하게 부은 얼굴에 불만 섞인 눈빛의 아이는 나의 물음에 대답도 없이 나가 버린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러 온 게 분명한데 수업 중이라는 핑계로 그 아이의 표정을 외면했다. 이후 풍경소리는 계속 울렸다. 나가 보면 아무도 없는 공간에 문소리만이 나뒹굴었다. 누구의 장난인지 짐작은 갔으나 문을 열어 확인하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쉬고 있을 때다. 또 문이 열린다. '옳거니. 너, 잡았다.' 문장난의 범인 영이와 눈이 마주쳤다.

 "영이, 무슨 일이야? 어서 들어와"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을 한 채 영이가 소파 끝에 엉덩이를 댄다.

 "너 선생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학원 문을 그렇게 열었는데?"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가,

 "선생님, 나빠요. 전 순이보다 선생님이 더 미워요" 앞뒤 맥락도 없이 공격해 들어온다. 그럼에도 난 그 말의 의미를 짐작했다. 웃음이 나는 걸 참고 장난스레 받아쳤다.

 "영이 너 속이 좁은 아이구나. 선생님은 네가 다 이해할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인데 선생님 생각이 틀린 거야?"

 "선생님은 제가 선생님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엄마, 아빠가 한 것과 똑같은 말을 해요. 선생님은 제 편을 들어주셨어야죠."


 나를 좋아하기에 나의 말이 상처를 받았다는 이 아이. 영이는 초등학교 4학년 아이다. 이해력이 좋아 상황 판단도 빨랐다. 영이와 말을 할 때면 다 큰 어른과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아이의 언어 구사력 때문이다. 그런 능력이 독서의 효과인지 가정교육의 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되었건 영이는 나와 대화가 통하는 몇 안 되는 어린아이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영이가 대견스럽고 예뻤다. 새 학년이 되어 학원을 정할 때도 독서 학원만은 꼭 넣어달라고 했다 하니 부담스럽게 예쁜 아이다. 게다가 부모님을 설득해 1학년이 되는 동생까지 다니게 했다. 문제는 거기서 생겼다. 영이의 동생 순이가 학원에 오면서부터다.


 영이의 동생 순이는 또래보다 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몸집도 작고 말할 때 목소리까지 애기 소리가 났다. 손은 또 어찌나 작은지 글씨를 쓸 때면 고사리 머리 하나가 꼬물거리는 것 같다. 입을 열어 말만 해도 웃음이 나고 고 귀여운 볼을 콕콕콕 꼬집어 주고 싶었다.


 그런 순이가 실수를 했다. 어제 자기를 데리러 온 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 언니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이다. 영이는 문구사에서 손에 넣고 주무르는 말랑거리는 풍선 같은 걸 사 왔다. 괴상한 느낌의 물건이었다. 작은 풍선 안에 자잘한 알갱이가 들어있는데 차갑고 물컹거리는 느낌이 선뜩했다. 언니가 두고 간 그 물건을 만지작거리다 순이는 표면에 연필 자국을 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영이가 화를 낸 건 당연한 일이다.

 "순이 너 언니가 이제 막 문구사에서 사 온 건데 이렇게 낙서를 하면 어떡해?"

 "언니야 미안해. 내가 지울게"

당황한 순이가 지우개를 들고 연필 자국을 지우려고 했다. 고정되지 않은 물컹덩어리가 자기 몸을 쉽게 내어줄 리 없다. 이리저리 몸만 비틀 뿐이다. 둘의 언쟁에 내가 끼어들었다.

"영이야, 순이가 네 물건을 말도 않고 만진 건 잘못이지만 일부러 연필 자국을 낸 건 아니잖아. 순이가 이렇게 미안해하는데 언니인 네가 좀 용서해 줘라. 영이 너는 마음이 넓은 아이잖아. 선생님은 영이가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는데 아니니?"

 "아니 넌 왜 남의 물건을 말도 않고 함부로 만지냐고~"


 영이가 옆 교실로 가 순이를 기다리는 동안 순이는 안절부절못하며 영이의 눈치를 살폈다. 난 영이에게로 가 마음을 달래주며 순이에게 괜찮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했다. 난처해하는 동생이 가엽다면서 말이다. 이 말에 영이는 상처를 받았다. 그동안 영이는 이런 상황을 늘 겪어왔던 거다. 맞벌이하는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챙기며 무슨 일에서건 언니인 자신이 이해하고 참아냈던 거다. 그런데 그 일을 내가 또 요구했다. 영이는 서러웠다. 한번 정도는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나 역시 자신의 부모와 다를 바 없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영이로선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한 번쯤은 기울어진 이해를 받고 싶었다.


 영이를 안아주었다. 영이의 몸이 팔 안으로 쏙 들어왔다. 참 작은 아이다. 이렇게 작은 몸이 언니라는 이름 하나로 늘 배려하고 이해하는 생활을 했다. 영이도 순이와 같은 어린아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그저 말이 통하는 아이라 속이 깊은 아이라 나의 생각처럼 이해해 줄 거라 여긴 것이다.


 비교라는 게 참 무섭다. 부모에게 자식은 나이가 들어도 어린아이인데, 동생을 둔 언니나 형은 늘 동생보다는 어른스러운 행동을 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나이가 많고 적음을 떠나 어른이 되어야 했다.


 영이는 다시 밝아졌다. 동생을 잘 챙기고 동생이 학원에서 실수한 것은 없는지 묻는 어른아이가, 다시 되었다. 나에겐 이제 그 모습마저 천진스러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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