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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Dec 09. 2021

정조, 사랑보다 매력적인 그의 정치

'옷소매 붉은 끝동'을 보고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 정조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옷소매 붉은 끝동'의 기세가 무섭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양난 이후 변화된 조선을 이끌며 역적 사도 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와 아비를 죽인 할아버지(영조)의 절대 권력 앞에서 한없이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젊은 정조의 아슬아슬한 삶을 한 여인과의 사랑이야기로 엮어낸 드라마다. 비록 실존 인물에 가상의 이야기를 덧입히기는 했으나 역사의 거대한 골격을 토대로 하기에 보는 이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정조는 당찬 궁녀 성덕임만을 바라보는 순정파 세손이다. 배우 준호의 비주얼과 목소리가 만들어낸 정조는 왕이 되기 전부터 멋졌다. 그런 그가 만천명월주인옹이 되어 조선의 백성을 품어주니 그의 사랑을 믿음직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조의 사랑 이야기는 그의 정치 이야기만큼 매력적이지 않다. 백성을 위했던 그의 정치는 사랑보다 아름다웠다.



정조는 정치에 있어 고수였다. 모든 음을 배열하고 조절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대소 신료를 적절하게 조정하며 그들을 들었다 놨다 했으니 말이다. 그는 유하게 풀어줄 때와 강하게 몰아붙일 때를 알았다. 그런 능력은 즉위식에서 했던 말만 봐도 알 수 있다. 즉위식에서 정조는 자신이 사도 세자의 자식임을 밝힌다. 사도 세자를 죽음으로 몬 벽파의 가슴을 싸늘하게 만든 말일 수 있었다. 허나 그는 그 말을 자신은 사도 세자의 아들이나 선대왕(영조)의 뜻에 따라 효장세자의 아들이 되었으니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으로 세도 세자의 추숭 문제 따위를 꺼내지 말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세게 치고 부드럽게 어루만진 꼴이다. 신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젊은 왕의 담대함 앞에 숨죽였을 것이다. 복수가 아닌 포용으로 손을 내민 그가 눈물 나도록 고마웠을 것이니.


이들뿐만 아니라 정조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한 이들은 따로 있었으니 공자와 맹자를 공부했어도 시험 볼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서얼 출신들이 그들이다. 서얼의 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라 부른 이덕무는 자신은 글밖에 모르는 쓸모없는 인간이었는데 어진 임금이 가없는 은혜를 베풀어 비로소 사람 노릇을 하게 되었다며 가슴으로 울었다. 이덕무가 느꼈을 절절한 고마움은 정조 곁에서 개혁을 도운 박제가나 유득공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거기다 정조는 능력 있는 젊은 인재를 발탁하고자 초계문신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 재능 있는 문신을 의정부에서 추천받아 규장각에서 교육시킨 것이다. 정조는 이들을 신분과 당파에 상관없이 능력만 보고 선발했으며, 학문을 익히고 연구하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본래의 직무를 면제해주기까지 했다. '객래불기(책을 읽는 동안 손님이 와도 일어서지 말라)'란 말로 그들의 권위를 세워주었고, 직접 강론에 참여하기도 하고 시험지를 채점하면서 그들과의 믿음을 쌓았다. 이런 정조의 노력 덕에 훗날 초계문신들은 정조와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든든한 관료가 된다. 정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정약용도 초계문신이었다.


이렇듯 훌륭한 인재들과 더불어 백성을 위해 살고자 했던 임금이었기에 정조의 죽음은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자주 거론되는 독살설 역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되었으리라 본다. 정조 사후 독살설의 배후로 자주 지목된 이들은 벽파였고 그 꼭대기에는 수장 심환지가 있었다. 그런데 2009년 정조 독살설의 힘을 잃게 만든 자료 하나가 발견되었다. 2016년 보물로 지정된 <정조어찰집>이다. 이 어찰집을 보면 정조와 심환지는 정치 현안뿐 아니라 개인사까지 터놓으며 3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심환지는 정조의 병을 알고 있었고 치료에도 힘썼다. 그를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하기엔 뭔가 부족함이 있는 듯하다. 정적이었음에도 유학을 공부한 군자로서 서로를 존중한 둘의 정치가 실로 놀랍다.



옷소매 붉은 끝동, 궁녀의 옷소매 끝동이 붉은 것은 그들이 왕의 여자라는 걸 나타내기 위함이라 한다. 그러니 제목만 보면 이 드라마는 정조보단 그가 사랑한 여인 의빈 성씨의 이야기에 가깝다. 제목이 그렇다 한들 어떠랴. 정조가 되었든 의빈이 되었든 우리의 금요일과 토요일 밤은 두 사람이 책임지고 달달하게 달구어주는데. 그들을 생각하니 글을 쓰는 이 순간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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