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구슬 Dec 15. 2021

가슴에 갓물 들 듯

김장을 마치고

김장을 마치고

숙제 하나를 마쳤다. 12월이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선 별 것도 아닌 주제에 부담감만 팍팍 주는 그런 숙제다. 결혼 후 한 번도 거르지 않았기에 결정만 내리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것을 끝마치기까지는 이렇듯 마음이 복잡하다. 작년에는 남편이 손을 다쳐 내가 해야 할 몫이 많았다. 김장 이야기다. 올해는 일당백을 담당하는 남편이 이틀의 연가를 내서 일을 도맡아 주었기에 손 안 대고 코 푼 격으로 수월하게 일을 마쳤다. 물론 내가 편한 만큼 남편이 힘들었다는 건 안다. 김장할 때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젓갈을 끓이는 일인데 그 일을 남편이 했으니 말이다. 


젓갈을 끓이는 일이 쉽지 않은 건 일을 하는 행위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옷이며 머리카락 심지어 속옷에까지 스며드는 냄새를 감당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냄새는 하루가 넘도록 집안에 달라붙어 젓갈을 끓이지 않은 사람들까지 꽁꽁 옭아맨다. 아파트에서 김장을 하기 힘든 이유 하나를 들라면 이 일이 선두에서 손을 들고 서 있을 게 뻔하다. 남편은 젓갈을 끓이고 걸러내는 일을 끝내고는 불려놓은 찹쌀로 찹쌀풀까지 쑤었다. 고된 일만 골라한 것이다.


올해의 김장은 작년보다 양도 많았다. 양념소가 많아 김치 가짓수가 늘어나서다. 계량을 해서 소를 만든다 해도 양념으로 들어가는 채소들의 크기와 묶음이 차이가 나니 양념의 양도 들쑥날쑥해질 수밖에 없다. 배추김치 외에 다른 김치를 담아도 될 듯하여 갓과 총각무를 절였더니 김장이 풍성해졌다. 일이 늘어남이 고단할 법도 한데 배추에 비해 손질이 쉽고 절여지는 시간이 짧은 갓이나 총각무는 양념만 있으면 쉽게 버무릴 수 있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물론 이런 김치도 김장철 외에 다른 계절에 따로 시간을 내 담았다면 충분히 부담이 될 일이다. 그런데 노동의 강도가 센 김장김치 앞에 놓이다 보니 이 정도의 일은 일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갓과 총각무는 학원에 가기 전에 절여놓고 퇴근 후에 씻었다. 갓을 씻는데 갓물이 풀어내는 색이 어찌나 고운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까지 갓김치를 수십 차례 담갔지만 이토록 아름다운 색을 보는 건 드문 경우다. 그 색을 그대로 흘려보내기 아까워 별다른 쓰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 맑은 물을 유리병에 담아냈다. 자연이 빚어낸 오묘한 보랏빛이 한지에 먹물 스미듯 가슴으로 번져나갔다. 


가슴에 갓물 들 듯

갓은 독특한 맛과 향으로 자신의 이름을 가진 김치가 되기도 하지만 다른 김치의 맛을 살려내는 양념의 일도 한다. 자신만의 색이 확실하여 일을 충실히 마친 후에는 흔적까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는다. 


갓물을 보며 갓과 같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다. 자신의 일을 마치고 흔적까지 아름답게 남기는 그런 사람 말이다. 마음에 찌꺼기 하나 남지 않는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가슴에 번진 갓물의 맑음 때문이리라. 


숙제의 결과는 확실했다. 10통의 김치통은 김치냉장고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았고 갓김치와 총각무김치는 열외로 시원한 마루를 차지했다. 이들은 각자 시원한 곳에서 담근 이의 마음을 생각하며 따뜻하게 익어갈 것이다. 들락날락 조화롭게 물들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조, 사랑보다 매력적인 그의 정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