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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y 03. 2022

그냥 추억의 맛이라 우길래

푹푹 잘도 익은 김치

김치냉장고의 김치통이 비워지면서 김장 당시 김치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하고 냉장고에 머물러야 했던 김치통에게도 기회가 왔다. 김치냉장고에 자리가 생겼으니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이 김치통은 김치냉장고에서 조용히 숙면을 취하며 여유롭게 익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채 열렸다 닫혔다 정신이 없는 냉장고에서 신경깨나 쓰며 붉으락푸르락 열을 받아왔을 터다.


김치냉장고로 옮기기 전에 한 번도 열지 않았기에 내용물의 정체조차 알 수 없었던 문제의 김치통을 열었다. 안에는 의외의 김치가 들어 있었다. 김장 때는 좀처럼 담지 않은 김치. 총각무김치였다. 이 김치를 담았다는 건 오래 두고 먹으려 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총각무김치는 배추김치처럼 오랜 시간을 두고 익혀 먹는 김치가 아니라 살짝만 익어도 먹을 수 있는 김치였기에 일부러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빨리 먹으려 한 게 분명하다. 그런 김치를 한동안 잊고 지낸 탓에 김치가 익어도 너무 익었다. 김치통을 열자 시큼한 냄새가 콧구멍으로 직진했다. 곰삭은 김치의 시큼함이었는데 거기엔 시원함이 달려 있었다. 입안에서 대책 없이 침이 돌아 무 한쪽 귀퉁이를 잘라 입에 넣었다. 저절로 눈이 찡그려졌다. 역시...


김치냉장고에 넣어 더 오래 묵힐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익은 김치를 싫어하는 남편에게 김치 상태를 말했더니 '아깝네' 하더니 어머니 몰래 살짝 버리라고 한다. 이렇게 시어 빠진 걸로 뭘 하겠냐 싶었던 거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김치가 아깝기도 했지만 그렇게 많은 양을 버리면 죄를 받아 지옥불에 떨어져 좁은 식도로 무김치만 받아먹을 거 같아서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주셨던 김치 된장국을 떠올렸다. 엄마는 배추김치가 시어지면 양념을 털어낸 김치를 찬물에 담가 짠기를 뺀 후 박박 씻고는 멸치로 육수를 낸 물에 된장을 풀어 국을 끓여 주셨다. 그렇게 국을 끓이면 김치에 스며들었던 감칠맛이 우러나와 구수하고 짭조름한 된장국이 되었다. 그 맛이 몸속에 스며들었는지 이렇듯 한 번씩 불쑥불쑥 나를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청국장도 아니고 된장국에 무를 송송 썰어 국을 끓인다는 게 괴이하여 그냥 멸치를 듬뿍 넣고 푹 졸여 보기로 했다.


내 입맛 참 촌스럽다

우선 총각무를 찬물에 담가 신맛을 뺐다. 커다란 냄비에 김치가 잠길 정도의 물을 붓고 손질한 국멸치를 두 줌 넣었다. 없던 맛은 멸치가 끌어올리리라 믿었다. 그 위에 파와 마늘을 넣고 고춧가루를 살포시 덮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스피드가 아니라 기다림이다. 이런 음식은 스피드론 맛을 낼 수 없다. 손맛도 필요 없다. 그저 기다림이 필요할 뿐이다. 김이 모락모락 뚜껑을 들썩일 때쯤 불을 줄여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을 갖었다. 뚜껑을 닫았는 데도 냄새는 부엌을 덮고 옷에 배었다. 얌전한 음식은 아닌 것 같다. 여기저기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니.


맛은 입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음식이 말해 주었다. 맛은 눈으로도, 코로도 볼 수 있다.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상태로, 콧속으로 전해지는 냄새로. 불을 꺼야 할 시간이 되었다.


냄새만으론 합격인데 맛은 어떨까? 가위로 무의 귀퉁이를 잘랐다.

와, 이건.. 배신이다, 배신. 이건 완전 배신의 맛이다. 음식 맛이 어쩜 이러냐 싶다. 당장 밥통 앞으로 달려가 밥을 덜어 찬물에 말았다. 밥을 입에 문 채 무를 한 입 베었다. 입안에 무의 달큼하고 짭짤한 맛이 번졌다. 바람의 향을 담은 맛이다. 밥과 물과 묵은지의 조화로움은 쨍한 봄날 들판에서 먹는 새참의 달콤함이다.


그런데 막상 식탁에 차려진 무조림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아들의 '으~, 이 비주얼 보소'와 남편의 '자네나 많이 드시게'가 기다림이 만들어낸 맛을 무시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젓가락은 무를 향했고, 나의 손놀림은 그보다 빨랐다. 밥을 더 먹고 싶다는 말에 남편이 그 반찬에?라는 눈빛으로 '입맛 한번 촌스럽네'라며 나를 놀렸지만 거짓말 안 보태고 그건 먹어보지 않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먹어 봤다면 스스로 냉장고 깊숙이 숨겨두고 몰래몰래 꺼내 먹고 싶었을 테니.


어찌 되었건 입맛이 촌스럽다며 나를 놀린 놀린 남편과 시큰둥한 아들 덕에 좋아하는 음식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나 혼자 사랑에 빠져 음미했던 그 맛은 음식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 입안을 자극했던 어떤 추억과 맞닿아 있었는지 모른다. 불현듯 엄마의 김치 된장국이 떠오른 것처럼.


해서 내가 총각무김치 조림을 좋아한 것은 입맛이 촌스러워서가 아니라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던 추억의 맛에 손이 닿았을 뿐이라고 애써 우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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