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구슬 May 25. 2023

부모가 되고서야 알게 되는 부모의 마음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

내가 읽은 헤세의 소설

청소년 시절 헤르만 헤세의 소설에 심취했었다. 그때의 난 그가 쓴 소설이라면 내용이 이해되건, 이해되지 않건 상관하지 않고 무작정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중 <데미안>의 알을 깨는 새 이야기는 글귀가 좋아 예쁜 글씨로 필사를 해서 코팅을 한 후 책갈피로 사용하기도 했고, 노벨상의 위엄을 과시한 <유리알 유희>는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음에도 완독의 의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때 읽은 <싯다르타>는 복에 겨워 자신의 삶을 차버린 철없는 인간의 이야기로 읽혔다. 그처럼 살고 싶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처럼 살 수도 없는 그런 삶을 산 사람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싯다르타의 고행은 나에게 깨우침을 주기는커녕 쓸데없는 생고생으로만 비쳤다. 어찌 보면 그의 심오함을 이해하지 못한 미천한 이해 능력과 미성숙함 탓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런 헤세의 소설을 어른이 되어 다시 읽고서는 알았다. 그의 소설이 왜 성장 소설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나는 그의 소설을 읽고 한 단계 성장했다. 싯다르타를 통해 전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사실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고매한 지성이나 열반에 오른 완성자라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식 앞에서는 어떤 부모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싯다르타의 삶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싯다르타의 삶이 나에게 남긴 가장 강한 여운은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에 오른 성스러운 자의 모습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자유로워지려 했던 고행자의 모습과 자식을 자신의 곁에 묶어두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완성자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떠난 자식으로서의 싯다르타와 자식을 떠나보내야 했던 아버지로서의 싯다르타. 


소설 <싯다르타>는 불교를 탄생시킨 고타마 싯다르타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인물의 이야기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싯다르타는 붓다인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때 붓다 고타마와 구분해서 읽어야 함을 기억했으면 한다.


싯다르타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 맨 꼭대기에 위치한 성직자 계급인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존경받는 아버지와 훌륭한 스승들에게 교육을 받은 그는 그들의 사랑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아이로 성장한다. 그의 앞날은 보장된 것처럼 보였고, 그가 지닌 인격은 가히 집안의 자랑으로 남을 만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배우고 또 배워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자리했다. 그가 느낀 허전함은 부모의 사랑이나 친구의 우정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모든 이의 내면에 불멸의 존재로 남아 있다는 아트만, 배움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고 스스로의 깨달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싯다르타가 사문이 되기 위해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할 때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말한다.


"격하고 성난 말들을 입에 담는 것은 브라만이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불쾌한 감정이 나의 마음을 흔드는구나. 네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는 것을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는 싯다르타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의 길로 들어서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이 고생길로 들어서겠다는데 두 팔 벌려 찬성을 하겠는가. 하지만 싯다르타의 아버지는 싯다르타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무리 고매한 인격을 지닌 그라도 자식을 설득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떠난 싯다르타는 친구 고빈다와 함께 사문(도를 닦는 사람)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사문 생활을 통해 자아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가 배운 명상이나 단식만으로는 열반의 경지에 오를 수 없었다. 명상과 단식은 자아 상태의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는 할 수 있었어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완전히 벗어나게는 못했다. 그러던 중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키고 열반에 올랐다는 붓다 고타마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함께 사문 생활을 청산하고 고타마의 설법을 듣기 위해 길을 나선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설법을 들으며 그에게서 완성자의 모습을 본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은 자라도 깨달음의 순간을 말이나 가르침으로는 전해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스스로 깨닫기 위해 그의 곁을 떠난다.


고타마를 떠나 세속 생활 속으로 들어온 싯다르타는 기생 카밀라와 사랑을 하고 상인 카마스와미 곁에서 부와 권력을 누리지만 여전히 유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그들과도 작별을 한다. 그리고 사문 시절 자신에게 선뜻 잠자리를 내어주었던 뱃사공 바주데바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바주데바의 제자가 되어 강을 통해 참선을 하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간다. 


싯다르타는 카밀라가 남기고 간 자신의 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사랑으로 돌본다. 아들이 자신에게 걱정과 고통을 끼쳐도 그를 사랑했기에 참아낼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아들을 윤회의 고통에서 허덕이게 할 수 없어,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치고자 자신의 곁에 묶어두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들을 분노케 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가는 길에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아버지는 선하고, 호의적이며, 부드럽고,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조건이 그를 잡을 수는 없었다.


싯다르타는 자식이 떠난 후에야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느꼈을 기분을 이해한다. 자식이었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기분을 아버지가 된 후에 깨달은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깨달음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부모가 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고도의 감정이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 같지만, 각자 걸어가는 길은 따로 있다. 브라만이었던 싯다르타의 아버지가 걸었던 길이 있었고, 싯다르타의 길이 있었다. 싯다르타를 외면한 싯다르타의 아들의 길도 있었다. 그들을 각각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갔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부모들은 자식의 행복을 바란다면서 자신이 선택한 길 위에 자식들이 서기를 강요한다. 그러면 자식들은 튕겨 나간다. 강요하지 않는 인내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단단하게 유지시킬 때가 있다. 그때는 자식의 선택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싯다르타가 그것을 알려주었다. 이 책을 읽은 또 다른 이들도 그것을 느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