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방콕 생활.

잃고서 얻은 것.

by 은빛구슬
여행이 취소되었다.


"ㅁㅈ, 돈 몇 푼에 네 인생을 담보 잡히고 싶어? 잘 생각해"

"그래. 그곳은 중국인 관광객이 많으니까 절대 안전하지 않아. 손해 보더라도 취소해"

"할머니도 생각해야지. 너야 젊어서 괜찮다지만 다녀온 후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떡할 거야?"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반대 의견에 딸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면 괜찮을 거라 말했지만 모두를 설득시키기엔 힘이 약했다. 그렇다고 말 몇 마디에 포기해 버리기엔 그동안의 준비 과정 또한 너~무 아까웠다.


진.퇴.양.난.


딸은 고민에 빠졌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설이 지나면 바로 출발인데..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딸의 '방콕 프로젝트'는 은밀하면서 위대했다.


딸의 입에서 여행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우리 중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여행을 좋아한 딸은 방학 내내 모은 아르바이트비 전액을 여행 경비에 투자했다. 우리 부부에겐 단 한 푼의 돈도 요구하지 않았기에 올해의 여행은 없는 걸로 생각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비밀로 남겨둘 수 없었던 그 일은 결국 딸의 입을 통해 밝혀졌고, 그와 동시에 날아든 중국 우한의 비극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린 몰랐다. 우리가 전 세계 국가들의 외면 속에 입국 제한국의 맨 꼭대기에 오르게 되리라는 걸. 그저 우리나라는 안전한 나라이고, 다른 나라 특히 중국 관광객이 많다는 태국과 같은 나라만이 여행 위험국이 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고로 우리의 반대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가족들의 설득과 계속되는 언론 보도로 딸은 입장을 정했다. 하루라도 빨리 취소를 하고 돈을 환불받아야겠다고.


딸과 친구들은 항공사와 호텔에 전화를 걸어 그들의 취소는 단순한 변심이 아닌 천재지변과 같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한 문제라 말하고, 전액은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위약금만으로 환불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항공사와 호텔은 쉽게 결정을 내려주지 않았다. 당시 중국 관광객에게는 환불이 결정되었지만 다른 국가에 대해서는 환불 규정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러나 끈질긴 전화와 지속적인 확인으로 딸과 친구들은 결국 만족할만한 돈을 돌려받았다. 여행 관계자나 항공사의 피해를 생각하면 못할 짓이지만 딸의 행동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요즘 아이들의 모습은 이런 것인가 놀랍기만 했다.


여행 취소로 얻은 것


딸은 개강이 늦어졌음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자취방에서 버티고 있다. 온 나라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일상을 멈추고 있을 때 딸은 스스로 세상과 거리를 두었던 거다.


갇힌 공간, 좁은 공간, 내가 느낀 딸의 공간은 그랬다. 그런데 딸에게 그 공간은 자유였다.


홀로 지내는 딸이 걱정되어 방문한 집 아니 방에서 나와 남편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 딸을 보았다. 거기에는 말도 안 되는 물건 하나가 있었다. 딸은 그 물건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느꼈던 짜릿함과 스릴을 무용담처럼 늘어놓았다.


남편은 그런 딸을 한심한 듯 쳐다보며,


"너는 지금 나이가 몇인데 게임을 얘기하냐? 속 좀 차려라"

"아빠가 몰라서 그렇지 이게 얼마나 힐링이 되는 게임인데?"

"무슨 게임에서 힐링을 찾아. 힐링하고 싶으면 그 시간에 책을 봐. 책을"

"책도 읽지, 강의도 듣고..."


남편과 나는 게임이란 말을 들으면 중독이란 말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우리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그것을 싫어한다. 그건 파괴의 다른 이름이고, 전진하는 인생을 발목잡는 걸림돌이다.


그런데 딸이 게임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게임을 자랑하듯 보여준다.


'동물의 숲'


캐릭터가 귀여웠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알 수 없는 말로 쫑알거리는 동물들이 하도 귀여워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내가 알고 있던 게임이 아니었다. 내가 봤던 게임들은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시끄러움을 장착했었다. 그런데 이 게임은 왠지 마음을 순화시킬 거 같다. 뭔가?


딸은 게임기를 통해 친구들과 모임을 하고, 일을 하고 취미 생활을 즐겼다. 아빠와 캠핑 다니며 바라 봤던 밤하늘의 별들도 그 작은 방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딸이 말했다.


엄마와 아빠는 열린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영화와 드라마, 유튜브를 하나의 콘텐츠로 인정한 것처럼 게임도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리고 스마트폰이 누구의 손에서나 자유로워진 것처럼 게임도 그렇게 될 거니 무조건 비판하고 막을 것이 아니라 좋은 프로그램 개발을 우선해야 한다고.


딸은 방콕 방문이 취소되면서 받은 돈으로 닌텐도 스위치 모동숲을 구입했다. 긴 멈춤의 시간을 힘들게 보낼 뻔 했는데 예상 못한 행운을 만난 것이다.


동물의 숲은 일본산 게임이다. 게임이란 말이 주는 인식에 일본산이란 인식까지 더해졌으니 눈길조차 주지 말아야 할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열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본다. 막을 수 없는 일이면 나쁜 쪽보단 좋은 쪽으로 이끌어야 한다. 수요는 계속 발생하는데 나쁜 것이니 막아야한다고만 해선 안 된다. 보완책이 필요한 이유다. 스마트폰이 아이들에게 유해하다고 스마트폰을 뺏을 순 없다. 이 또한 올바른 사용법이 필요한 이유다.


한국의 게임 산업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래서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으려면 그것이 가진 유익성을 어필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좋은 아이템으로 말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세상을 조금 떨어진 상태로 바라보았다. 멀리서 바라보니 더 넓게 볼 수 있었다. 가까이선 볼 수 없었던 나 자신의 편견도 목도할 수 있었다.


이제 곧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우리는 또 그날 그날의 삶에 매몰되어 생각하는 일을 멈출지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도 우리의 생각은 멈춰선 안 된다. 지금처럼 조금 떨어진 상태로 넓게 바라보아야 한다.


딸의 여행 취소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난 넓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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