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채움이 아닌 비움에서 시작하다.

[제주도 한달살기 시즌1] 2화. 나는 시골아이였다.

by 일상라빛

*등장인물: K(반려자), J(18개월 똥강아지)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된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 헤르만 헤세
02-1.jpg Andrew Wyeth앤드루와이어스 <크리스티나의 세계> 1948년




자동차를 잠시 멈춰 세웠다. 방파제에 앉아 햇살 비치는 바다의 일렁임을 구경하는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계획된 여정보다는 마음 발길 닿는 대로 멈춰서 눈과 귀를 열어 마음에 담는 순간들이 나를 채웠다. 이제야 마음이 탁 트이고 편안하다. 그래, 이거 다! 이 것을 위해 이 곳에 온 것이다!





여행은 짐을 챙기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2주 살이를 위해 하루 동안 준비물 리스트를 만들고 1주일 동안 짐을 챙겼다. 일부 후기에서 사소한 것들까지 챙겨야 한다는 블로거들의 조언에 아쉬움 없이 필요한 것 들을 모조리 담았다. 잠자리에 들려고 누우면 안 챙긴 것들이 생각나 벌떡 일어났고, 캐리어에 구겨 넣기를 두세 번 반복한 후 에야 만족감으로 잠이 들었다. K는 차와 함께 배편으로 하루 먼저 이동해야 했고, 모든 짐은 차에 실어야만 했다. 지하 주차장을 10번 정도 왔다 갔다 반복한 후 에야 짐 옮기는 작업이 끝이 났다. 여행이 아닌 이사였다.


너무 많은 짐을 실었구나.
부족한 대로 그 삶에 만족하며 사는 법을 모르는 '배부른 자의 짐'이었다.


이어폰의 최신 음악 대신 귀뚜라미의 라이브 소리가 더 기분 좋은 제주의 첫날밤이 싫지 않았다. 꽤 낭만적이고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지 모른다. 제주도에 살고 싶다 생각한 것이. J도 좋은 지 9시가 넘었는데도 웃고 춤추며 새 집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구석구석 온몸으로 쓸고 만지고 혀를 날름거리며 탐색작업을 마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살면서 하루에 가장 많은 이동수단을 거친 여행길이었다. 택시, 기차, 공항철도, 비행기, 자동차. 울지 않고 잘 버텨준 J에게 고맙다. 한 달 내내 병치레를 하다가 비행기 취소를 고민했던 차였는데, 오랜만의 바깥구경에 신이 난 J의 감정이 자고 있는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환희와 행복 그 자체였으리라. 옆 자리에 누운 내 얼굴에도 같은 미소가 번졌다.


새집아 잘 부탁한다. 앞으로 2주간 잘해보자!



일.소.행: 일상의 소소한 행복


‘일소행’을 느끼기 위해서는 '여행을 떠날 것'을 추천한다. 관광지를 찾아 바쁘게 움직이고, 맛집 사진으로 SNS를 가득 채우고, 호텔 펜션 한 뼘의 뷰가 힐링이다 만족하는 ‘관광’이 아니다. 2주 이상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보는 것'이다. 기간이 길면 일단 마음이 편안해진다. ‘무엇을 해야겠다’는 ‘채움’이 아닌 ‘느긋하게 하면 된다’는 비움의 마음이 생기게 된다. 가령 지금은 새벽 2시 40분. 제주도에 온 첫날 잠이 깨서 1시간 넘게 잠 못 이루고 있다. 내일 늦잠 자거나 낮잠을 푹 자고 집 근처 산책이나 다녀올 요량이기에 조바심이 전혀 일지 않는다. 내일 어디를 가서 무엇을 보고 먹을지 맛집 검색을 하는 여행객의 마음이 아니었다. 진정 마음이 이곳에 있는 주인의 마음이었다. 관광객은 몸은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다시 돌아갈 그곳에 있다. 이곳저곳 둘러보며 눈에 저장하기 바쁜 이유다. 정작 마음을 채우지 못한 채 말이다.


관광객의 마음 창엔 과연 무엇이 남을까?
집주인의 마음으로 이곳에 2주간 살러 온 내 마음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무엇을 담고 무엇을 비울 것인가?
인생에 있어 중요한 질문을 던져본다.




청(聽): 임금같이 듣고 열 개의 눈과 같이 보고 하나의 마음같이 들어라


‘들을 청’의 한자는 무려 6개의 낱자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히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 귀 마음을 모아 열과 성을 다하여 들어야 함을 의미하고 있다. 제주도에 온 지 이틀째 수원에 있을 때는 닫혀 있던 귀가 열렸다. 밤 7시. 흐르던 음악을 끄고 텔레비전 소리를 끄고 밖의 소리에 집중했다. ‘뚜루뚜루 뚜루루 뚜뚜’ 자정까지 연신 울어대는 정겨운 소리. 어릴 적 추억 한 컷이 떠올랐다. 유치원 시절부터 봉천동 산동네에서 엄마와 함께 밭을 일구던 희미한 장면. 서울이었지만 시골이나 다름없는 산꼭대기의 집에서 배추, 무, 고추, 상추 등 먹거리를 심고 가꾸며 먹고살았다.


나는 시골 아이였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은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산속 숲 속 길에 자리 잡은 아카시아 꽃내음을 맡으며 귀가했다. 내리막길에는 신나게 엉덩이를 내어주며 흙 미끄럼틀을 탔다. 지금 같으면 흙먼지 묻는다고 싫어하겠지만 희한하게 엄마 아빠는 그런 소리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자라온 환경이 이래서 중요한가 보다. 시골아이는 어른이 되어 도시녀가 되었고, 잊고 살았지만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흙 바람 하늘. 시골의 냄새는 친구였고 오랜 벗을 만난 것 같이 편안했다.


나는 자연이 좋다.


비 오는 날은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마저 좋았다. 땅에서 올라오는 흙냄새도 좋았다. 눈이 오면 차가운 콧바람을 뚫고 눈보라가 휘날리는 것도 좋았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마음 가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금 제주의 이 생활이 너무나 황홀할 정도로 만족스러운 이유일지 모르겠다. 눈과 귀가 열리었으니 이제 마음이 열릴 차례다.




2018년 9월 24일

제주 둘째 날. 나무 하늘 바람을 기억하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8년 제주도 한달살기 이야기를 시즌1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순간의 영감들로 써내려 간 '라빛 시' 다음 페이지에 담았습니다.

*다음 주 3화도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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