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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상라빛 May 08. 2020

뜨겁고 차가웠던 제주살이의 기록 <인생이란 걸음마>

도전에도 마중물이 필요하다 <나도 작가다 공모전>

인생을 살면서 때로 변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현재의 삶이 변할 수 없을 때 다른 시공간에서의 삶을 꿈꾼다. 내게 2018년이 그러했다. 상담심리사를 꿈꾸며 프리랜서로 강의와 개인 심리상담 일을 하고 있던 나는 출산과 육아로 지쳐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었다. 24시간 아이와 한 몸이 되어버린 엄마라는 내 삶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인생 문구는 ‘먹이고 재우고 치워라 ’로 바뀌어 있었다. 특별함 없는 일상 탈출이 필요했고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 ‘제주도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타지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도전의 연속이었다. 2살 아이와 여행을 떠나본 적이 있는가? 챙길 짐은 끝도 없었다. 여정을 함께할 SUV 차 안에 앞 뒤 좌석까지 젖먹이 딸 짐으로 가득 채워 목포-제주발 배편에 실었다. 차량을 담당한 남편은 하루 전 출발했고, 유모차 딸린 2살 배기 딸과의 여정을 시작했다. 김포에서 제주공항까지 택시, 기차, 공항철도, 비행기 4개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미션을 수행했다. 그 날은 9월 24일 추석 대 명절이었고, 땀범벅인 채 딸과 나는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주에서의 일상은 맛집 탐방도 관광지 투어도 없었다. 첫날 아침,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앞 참새 관람이었다. 초록 잔디 위로 날아다니는 참새들, 지저귀는 새소리, 이런 풍경이라면 매일 아침이 기대해도 좋을 순간이었다. 나와 같은 마음인양 아이는 까치발로 서서 “짹짹 ”을 외쳐 댔다. 그날 이후 창문으로 보이는 참새, 고양이, 강아지는 우리 집 식탁의 아침 풍경이 되어 18개월 딸의 밥맛을 돋우는 재미를 더했다. 다음 날, 창문을 두드리는 비 소리는 음악이 되었고 창가에 흔들리는 나무는 Full HD TV가 되었다. 19층 아파트에서는 절대 느끼지 못한 일상이었다. 이웃집 할머니는 텃밭의 부추와 산 고사리로 정을 나누며 동네 친구가 되어주었다. 딸의 손을 닮은 ‘고사리 손'의 의미를 처음 알았다. 하루는 집으로 제비가 날아들었는데, 둥지 틀 곳을 찾는지 한참을 안방과 거실을 배회하는 것이 아닌가! 흥분한 딸의 고래 소리만큼 내 눈도 휘둥그레졌다. 흥부 놀부 책에서나 보던 제비의 실물을 처음 영접한 것이다. 놀라운 제비 부부의 환영인사와 함께 우리의 첫 제주생활은 시작되었다.



며칠간 폭우가 내리고 다음날 아침 해가 쨍하니 마음이 분주해졌다. 놀이도구와 간식거리를 챙겨 바다로 나갔다. 해수욕장의 넓은 잔디 야영장에서 딸과의 첫 캠핑을 시작했다. 물 빠진 오후 백사장은 모래 놀이터였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바다 물결을 맨발로 느꼈다. 잔잔한 물소리와 아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위에 걸터앉아 모래 놀이하는 아이는 한없이 평화로웠다. 놀다가 지치면 텐트로 돌아와 간식을 먹었고 졸리면 그대로 누워 한숨 잤다. 적당히 바람이 불었고, 적당히 해가 비추는 2평 남짓한 텐트 공간은 충분히 아늑했다. 딸이 잠든 사이 캠핑의자에 앉아 나무 햇살, 바다 모래를 감상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가져온 듯 한없이 여유로운 시공간이었고 육아 스트레스는 없었다. 작은 모래알 같은 이 시간들이 참 행복했다.



남편은 캠핑의 꽃,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야외 잔디밭에서 우리의 첫 바비큐는 먹어본 중 최고의 맛이었다. 제주도에선 밥맛이 왜 이리 좋아?! 남편과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집 앞 데크에서 저녁 파티를 했다. 새우 버터구이와 맥주는 환상의 짝꿍, 싱싱한 해산물을 먹는 맛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반복되고 지겹던 도시 일상이 제주도 1층 집 잔디마당에서는 매일 놀랍고 신나는 경험으로 가득했다. 한 달 동안 종일 자연에서 노닐며 함께한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다. 딸은 말문이 트이고 키가 쑥 자라 있었고, 처음 걱정과 반대했던 남편은 한 달 살기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내년 봄에 갈 두 번째 제주행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가장 큰 변화는 내게 있었다. 메말랐던 감정은 소중함, 즐거움, 재미라는 단비로 채워졌고, 스트레스 가득했던 일상이 정화되었다. 그리고 ‘일상라빛’ 크리에이터 작가를 꿈꾸며 제주바다와 도시 육지를 오가는 특별하고 재미있는 일상을 살고 있다.



시작은 항상 중요하다. 어린아이 걸음마 시작할 때의 ‘첫 발 떼기’, 우물물 길어 올릴 때의 ‘첫 마중물’ 이 그러하듯 인생이란 걸음마에도 '일단 시작해보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어렵다고 했다. 아이는 막 걸음마를 뗀 18개월이었고 유모차는 필수품이었다.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일단 시도했고 그 첫걸음은 세 번째 도전인 '4살 딸과 한라산 어승생악 정상 등반'까지 이루게 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제주도고, 어제 올레길 4코스 19km를 완주했다. 버킷리스트 또 하나를 달성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종주할 것이고 산티아고 순례길로 도전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내게 더 이상 ‘먹이고 재우고 치우고’의 일상은 없다. ‘먹고 도전하고 사유하라’ 만이 존재한다. 뜨겁고 차가웠던 주도 한 달 살기는 나에게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첫걸음이자 마중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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