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로 둔적은 없으시겠지만 제 선배이십니다.
호주 이민사회도 이제 이민 2,3세대를 넘어 4세대까지도 가는 그 역사가 깊어간다. 비슷한 또래끼리 '우리는 이민 1.5세대' 하며 청소일을 해보지 않았으면 인생을 얘기하지 마라 하며 웃던 기억이 있다. 더 시간이 지나면 이민 몇 세대 이런 말도 더 이상 의미 없으리라. 다방면으로 진출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자녀들 중에는 의사의 숫자도 제법 많다. 일반의라고 할 수 있는 General Practitioner는 전반적인 건강을 관리해 주고 각종 약처방도 해주지만 무엇보다 전문의를 만나려면 먼저 일반의를 만나 의뢰를 받아야 한다. 영어와 한국어가 능통한 일반의는 많아서 연로하신 분들도 편하게 진료를 받으신다. 그런데 전문의를 만나야 하는 경우에는 통역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이민 1세대로 이국적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삶을 일구어내신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는 때이다. 나를 후배로 둔 적은 없으시겠지만 나는 선배를 만나는 마음으로 이민자로 연로해 가는 것이 어떤 건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통역사가 오는지 몰랐던 분들 중 대부분은 아주 반갑게 맞아주신다. 나를 통역사 아주머니라고 부르시던 선생님이라 부르시던 너무 감사하다고 좋은 일 하신다고 손을 잡아주신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이렇게 감사를 받아도 되나 싶다.
아주 드물게는 나 통역 안 불렀어 통역 없어도 돼 하시는 할아버님도 계시다. 정부에서 이민자들을 위해 제공하는 무료통역서비스 이므로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으실 텐데도 적극적으로 거절하신다. 처음에는 어떤 이유로든 통역이 필요 없다는 말을 들을 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옆에 앉아만 있을게요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하고 능청스럽게 자리를 잡는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나와도 상관없겠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 자신도 오지랖 넓어가고 노파심 깊어가는 나이이다. 혹시 놓치신 부분이 있으면 지나가는 말인 척 설명을 해드린다. 그래도 그 할아버님은 다음 예약을 잡으시며 I don't need interpreter 룰 외치신다. 네 할아버님 그 짱짱함으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사십시오. 응원합니다.
연로해 가며 우리 몸이 쓰임을 다해가니 이비인후과나 안과를 종종 찾아야 하는 일은 당연하리라. 녹내장으로 정기적인 검사를 받으시는데 안압이 잘 관리가 되지 않아 힘들어하시는 어르신. 늘 그렇듯이 전문의와의 진료는 예약을 하고 가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림 끝에 의사진료를 받으시고 같이 나오는데 자꾸 걸음을 늦추신다. 내가 몇 발자국 앞에 나와있을 때 의사에게 나직이 glass of wine OK? 하고 물으신다. 의사가 웃으며 of course 한다. 어르신 얼굴이 밝아지며 thank you를 연발하신다. 참 귀여우시다 감히 그런 생각으로 속으로 웃는다.
놓칠 수 없는 와인 한잔의 기쁨, 저녁식사 후 한국 티브이를 켜놓고 혼자 드실 수도 또 비슷한 모습의 친구분들과 함께하실 수도 있겠지만 의사가 마셔도 좋다고 하는 그 와인 한잔은 어쩌면 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르신의 그 기쁨을 같이 누리며 안녕히 가세요 하는 내 마음이 덩달아 좋다. 작은 행복,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누리시는 어르신의 삶을 닮고 싶다. 누구의 죽음인들 황망하고 슬프지 않을까만은 이민자로 내 고향이 아닌 곳에서 연로해 가고 죽는다는 일은 그들의 고단했던 삶만큼이나 적적한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