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더니,

색안경 없이 봐줬으면

by Min

런던에 처음 발을 디딘 건 스물한 살이었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해외살이가 어느새 9년이 됐고, 나는 서른이 됐다.


나는 내가 쭉 20대로 살 거라고 생각했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면 뭔가 달라질까,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 하곤 했는데 사실 별다를 건 없었다. 29살과 30살의 차이는 딱 하나다. 29살의 1년과 30살의 1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 그래서인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사람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돈을 바라보는 눈이 아주 조금씩 달라졌다.


20대엔 패션도 좋아하고 명품도 좋아했다. 월급날이면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꼭 뭔가를 샀다. 그런데 30살이 된 지금, 그때 샀던 것들 대부분을 중고로 팔았다. 요즘은 옷에도 별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이 해외살이에서 악착같이 모을 수 있을까만 생각한다. 런던의 물가는 살인적이다. 월급이 한국보다 높아 보여도, 렌트비와 물가를 빼고 나면 도긴개긴이다. 렌트 내는 날엔 월급 절반 이상이 그냥 사라진다. 나머지로 생활비를 쓰면서도 일부러 20%는 꼭 저축했다. 솔직히 남은 30%로 생활하기엔 늘 빠듯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물건에 대한 욕심이 줄었고, 여행도 여유가 있을 때만 가게 됐다. 이런 소박한 삶, 미니멀하게 사는 게 오히려 편해졌다. 나이 탓인지, 해외살이 탓인지는 모르겠다.




해외 생활의 외로움은 계절을 탄다.

런던은 여름을 빼면 항상 잿빛이다. 비가 자주 오고, 겨울엔 오후 세 시만 돼도 어두컴컴해진다. 그게 11월부터 이듬해 4월 초까지 이어진다. 일하는 곳에도 한국 사람이 없다 보니, 가끔 한국인이 그리워질 때면 유랑(유럽의 든든한 동반자) 네이버 카페를 들어간다. 거기서 펍이나 바에서 같이 수다 떨 사람을 찾는다.

대부분은 여행객이고, 가끔 런던 워홀러를 만난다. 여기서의 장점은 일회성이라는 것. 인연이면 계속 연락이 이어지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스쳐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된다. 실제로 그렇게 만난 마케터 동생이랑은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작년 10월, 나랑 한두 살 차이 나는 동생을 어느 와인바에서 만났다. 유랑에서 동행을 구해 합류하게 됐는데, 대화가 너무 잘 통했다. 티키타카가 맞는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계속 만나서 놀았다. 그 친구는 베이스가 파리인데, 여름엔 런던에 오고 겨울엔 태국에 머문다. 리모트로 일하면서 다양한 나라를 오가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장비를 들고 다녀야 하는 직업 특성상 런던에 박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친구가 좋았던 건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거였다. 런던에 살고 있는 나를 보고 신기해하거나, 근거 없는 부러움을 투영하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 대화했다.




유랑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건 복불복이다.

처음 만나면 대부분 비슷한 흐름으로 흘러간다. "런던에 여행 오셨어요?" "영국 날씨 너무 흐리죠?" "영국 음식 맛없잖아요."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걸 마치 정답처럼 던지는 질문들. 나는 런던 살면서 날씨 때문에 불편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 없고, 영국 음식도 나름 즐기는 게 많은데. 질문들이 죄다 부정적이면 솔직히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그래서 요즘은 처음 보는 자리에서 굳이 내 직업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어느 날 바에서 있었던 일이다. 자리가 무르익으면서 AI 얘기가 나왔고, 그 무리 대부분이 CG를 신나게 욕하기 시작했다. 요즘 영화들이 망하는 건 CG만 넣고 스토리가 없어서라고, CG 많은 영화 싫다고, 마블이니 DC니 쳐다보기도 싫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채로 아주 거침없이.

나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면서.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다. 속상했다. 나는 마블 영화의 팬이고, CG로 채워진 영화들을 좋아하고, 그걸 만드는 사람인데. CG가 있기 때문에 영화가 시각적으로 더 풍부해진다고 생각하는데. CG 없는 마블을 상상해 본 적 있을까.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다가, 말없이 듣고만 있는 나를 누군가 발견했는지 갑자기 물어봤다.

"승민 씨는 여행으로 오신 거예요?"

"아뇨, 저는 런던에 거주하고 있어요."

얼마나 됐냐고 하길래, 대학 나오고 취업해서 일하는 정도라고만 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어떤 일 하는지 물어봐도 되냐고 했다. 사실 말해도 상관없었다. 민망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일 테니까.

"VFX 아티스트로 일하고 있어요. CG 만드는 일이요."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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