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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이저 Nov 01. 2021

21.11.01

라떼에 관한 단상

과거의 나를 회상하는 것만으로 '라떼는'이 성립되지는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라떼는'의 핵심은 어떤 이가 자신보다 덜 오래 산 사람 앞에서 과거의 무용담 혹은 고생담을 늘어놓으며 상대방 인생의 경험치를 일면 축소하는 말하기 방식이잖아요. 경험의 양이나 길이로써 대화의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가 '라떼는'을 '라떼는'으로 만듭니다. -이슬아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중


이번 주말엔 자기 얘기만 하는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살면서 수많은 라떼를 봤지만 내가 본 사람들 중에 가장 라떼력이 높았으며 가장 젊었다. 그나마 내가 겪은 라떼들은 기업의 대표라던지, 한국역사를 몸소 겪은 할아버지였다던지, 교수님이셨다. 라떼력을 설파해도 될 정도의 경력과 권위를 지니신 분들이라 그런 분들의 얘기는 참을인을 새기고 라떼를 걸러내면 유익한 점도 많다. 그러나 이번 주말에 겪은 라떼들은 이른바 '젊은꼰대'였다. 별로 배울점도 없고 재미도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경험을 포카칩 질소포장마냥 과대포장하는 것을 하릴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본인에 관해선 정치관, 종교관, 철학, 업무능력, 인간관계론까지(그러나 알맹이 없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에 불과한..) tmi를 늘어놓으면서 나에 대해선 이름과 나이만 물어봤다. 다시 말하지만 일방향 말하기 시간인 강연이 아니고 친목 시간 및 대화를 하는 술자리였다. 하 유튜브였으면 스킵할 수라도 있지 이건 뭐.. 아무튼 정말 괴로운 시간이었고 이런 식으로 주말을 날린 것이 분해서 급기야 글로 쓰기까지 이르렀다.


상대방이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 상대방을 궁금해하지 않는 말하기란 얼마나 위험하고 상대를 피곤하게 하는가. 오늘 읽은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라는 책의 남궁인 작가의 글도 그랬다. 끊임없이 상대를 궁금해 하고, 대화를 시도하려 노크하는 이슬아 작가의 글 뒤로 이어지는 남궁인 작가의 글엔, 겸손함으로 포장한 자기과시 혹은 자기해명만 보였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결여될수록 자의식이 비대해 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화려한 언변과 수사술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 자의식의 평수도 그다지 좁진 않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과 글을 보며 정신을 차리곤 한다.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려면 무엇보다 잘 듣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공부를 하는 것도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듣는 것임을......


문제는 나도 아직 말로만 할 줄 안다는 것이다. 나 또한 듣는 것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타인을 궁금해하기보다 타인의 이해를 갈구한다. 수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토론수업의 형식을 띠고선 애들이 말할 땐 내 다음 대사 생각하기 바쁘다. 애들보고 끼어들지 말고 내 얘기 끝까지 들으라고 하는 라떼선생이다.   


이번 주엔 나도 결론을 못내린 논제를 5학년 애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래 놓고 '~이런 거 아닐까?' 하고 말았다. '나는 더 구체적인 답을 알고 있지만 너희들이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게 여기까지만 말할게^^'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도 애들은 아! 하는 깨달음의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옆의 친구와 토론하기도 했다. 나는 혹시 나한테 답을 물을까 황급히 정해진 답은 없으니 글로 적으라고 하고 빠졌다. 참으로 찝찝하고 미안한 수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들의 반짝반짝한 글을 보곤 내가 정확히 답을 알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학생보다 모자르는 사람이 선생이 되어도 수업은 굴러가는구나, 이렇게 돈을 벌어도 되는 걸까 안도감과 죄책감이 번갈아 오갔다. 질문을 던져주고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한 데 나는 자꾸 답을 내리려고 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할 지 궁금해서 논제를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내 답을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려고 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나선 나도 조금 수업에 대한 부담이 내려갔다.  물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 나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절대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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