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여도 괜찮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는 영업은 못할 것 같아.'라는 말을 들은 적이 많다. 사실 나 조차도 실제 회사에서 영업 사원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기 전에는 막연하게 영업은 힘든 일이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당시에는 영업 사원이 물건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고, 영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더운 여름 서류 가방을 들고 힘들게 고객을 찾아갔지만 문전 박대를 당하는 드라마 속의 애처로운 인물의 모습만 맴돌았다.
#1. 첫 느낌 #정장 #프로 #어른 #성공적
저마다 접해온 매체나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에 따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으나 적어도 내게는 영업은 폼나는 직업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 입사 후에는 생각이 180도 달라졌다. 마케팅팀 책상 너머로 노련한 영업 사원들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영업에 대해 가져온 부정적인 인식을 바꾼 것이다. 그들이 시장에 대해 치열하게 분석하고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 멋졌다. 가끔 상식을 뛰어넘는 고객의 요구와 언사에 당황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찌 됐건 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영업은 정말이지 '꽃'이라 불릴 가치가 있었다. 사실 내가 영업 사원들이 참 멋있다고 생각한 데에는 언제나 그들을 빛내주는 칼 정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잘 차려입은 모습을 통해 빛나는 프로 영업인으로 완성되었다. 영업 사원들을 보면서 핏이 살아있는 정장을 입고 똑부러지는 말투로 고객을 설득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심장이 뛰었다.
영업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게는 의료 영업에 필수인 자동차가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본격적으로 뜻을 비추기 전에 중고차 한 대를 구매했다. 가진 돈이 없어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끌어 썼지만 인생의 첫 차를 받은 날 참 기뻤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나도 파랗고 반짝이는 아반떼를 가진 어엿한 어른이었다. 마침내 영업 사원이 되기 위한 기본 요건을 갖춘 것이다.
영업팀으로 가도 된다는 승인을 받은 날에는 바로 백화점으로 달려갔다. 당장 다음 주부터 입을 정장을 사기 위해서였다. 깔끔한 헤어 스타일로 변신을 하고 새로 산 정장을 입은 내 모습을 보니 스스로가 대견해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그렇게도 천진난만하고 어리숙했다. 되돌아보면 초반에 내게 영업은 앞으로 내가 걸어갈 구체적인 커리어의 첫걸음이었다기보다 내가 꿈꾸던 정장, 프로페셔널, 어른, 성취 등 단순한 단어나 이미지에 가까웠다.
장점도 있었다. 의료 영업을 하며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그 이미지들을 떠올리면 기분이 나아졌다. 고객과 풀기 힘든 문제가 주어질 때에도 "나는 '정장'을 입은 '프로'고, 똑똑한 '어른'이니까 문제를 풀고 '성취'할 수 있어. 열심히 일해서 차도 샀고, 노련함이 생기면 잘할 수 있을 거야!" 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물론 이런 위로로 해결되지 않는 이유들(#3. 내가 의료 영업을 그만둔 이유)로 인해 사직서를 냈지만 #정장 #프로 #어른 #성공적 이미지는 영업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자 생각해본 적 없는 직무를 꿈꾸고 시작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었다.
#2. 강제 뚜벅이 영업의 시작
의료기기 회사에서 스타트업 입직 후 연봉이 반토막 난 상황 속에서 은행 직원이 3개월 안에 대출금을 상환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퇴직금으로도 메꿔지지 않는 그 돈을 갚기 위해 돈 나올 구멍을 찾고 또 찾았다. 대출 상환을 지연하지 않을 유일한 방법은 내가 사랑하는 파란색 아반떼 처분 뿐이었다. 외면하고 싶은 사실이었지만 시원하게 이직을 결정한 대가로 나와 함께 한 달에 꼬박 2000km씩 달려준 자동차를 팔았다. 그렇게 다시 강제로 뚜벅이가 됐다.
의료기기 회사에서는 특정한 상품을 정해진 고객에게 판매하는 영업을 했다면, 스타트업에서 현재 나의 업무는 유저들이 구매할 만한 상품을 찾아 소싱하는 영업이다. 즉 어딘가에 있을 개인이나 회사가 우리 앱에 호스트로 등록을 하고 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최적의 상품을 구성하는 일이다. 세부적인 업무는 다르겠지만 배달의 민족에서 앱 내에 업장 정보를 등록하고 주문을 받을 업체를 찾아 계약을 맺는 일과 비슷하다.
#정장 #프로 #어른 #성공적 이미지로 시작한 영업이었는데, 이곳에서의 영업은 그것들과 거리가 멀었다. 갑자기 달라진 환경 탓에 '영업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일이 무척 힘들었다. 특히 로컬에 집중하는 시즌에는 콜드 콜(전화로 영업이나 마케팅 활동을 하는 것)로 미팅을 잡고 업장으로 직접 방문했다. B2B 영업을 제외하면 서비스 특성상 딱딱한 정장보다 편안한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캐주얼 룩을 입는다. 언뜻 보면 대학생이나 취준생 같은 옷차림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이힐은 당연히 금물이다. 일할 때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로컬 영업에는 정장보다 캐주얼룩이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 외에도 뚜벅이 영업은 여러 가지로 나를 힘들게 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업장에 가다가 머리가 핑 돌았던 적도 있고, 추운 겨울 정신을 못 차리는 내 아이폰이 갑자기 꺼지는 바람에 30분 동안 길을 찾아 헤매다 주저앉은 적도 있다.
지칠 대로 지친 내게 '영업의 재정의'가 필요했다. 이전 회사에서는 영업 사원이 가진 멀끔하고 번듯한 이미지가 큰 원동력이었지만 이제 차도 없고, 정장도 없는 매우 다른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억지로라도 '뚜벅이로 영업을 하니까 골목골목을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아! 내가 영업 안 했으면 언제 여길 와보겠어!' 라며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뚜벅이 영업의 장점이 내게 큰 동기부여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내가 하고 있는 영업의 가치를 살펴보고 이를 정의하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 입사 6개월쯤 지나 조용히 앉아 발로 뛰어 계약한 수 백 개의 개인, 회사들과 그들이 공급한 상품들을 살펴봤다. '새로운 상품이 있어 구매해봤는데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다'는 고객들의 후기와 '매출이 잘 나온 덕분에 업장을 확장 이전한다'는 호스트들의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 이 회사에서 내가 하는 영업의 가치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상품 즉 앱 서비스의 가치에 대한 확신과 내가 정말 좋은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구석구석에 있는 개인/업장이 우리 앱을 통해 더 많은 고객을 만나 수익을 창출하고, 앱 유저들은 우리 서비스를 이용하여 소중하고 특별한 경험을 한다.'
설득을 통해 우리 서비스를 모르거나 판매하기를 망설였을 개인/업장들을 유입시키는 것과 기획과 실행을 통해 유저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주는 것. 나의 이 두 가지 역할을 정리하자 영업 활동이 훨씬 재미있고 가치 있는 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기준에서는 이처럼 담당자 스스로가 맡은 상품이나 서비스의 가치를 깊이 공감하는 것이 곧 좋은 영업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회사에서 일하게 된 것은 영업 사원인 내게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판매하는 사람은 많이 팔 수록 세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에 놓일지라도 더 잘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세상에 이롭지 않은 상품이나 서비스를 억지로라도 판매해야 하는 영업 사원에게는 많이 팔면 올라가는 숫자 그 이상의 동기부여가 없다. 이런 경우 잘할수록 마음이 공허해지거나 매출 인센티브에만 지나치게 집착하게 될 확률이 높다고 본다.
이제는 차가 없어 지하철 역에서 20분을 걸어 미팅 장소에 가야 해도 슬프지 않고, 나의 확고한 취향인 정장을 입지 못해도 아쉽지 않다. 대신 언젠가 수십 명의 영업팀원들과 함께하는 회사, 그리고 언제든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는 크고 튼튼한 회사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