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존엄한 마무리

『어떻게 죽을 것인가』

by sue

어떻게 죽을 것인가

유시민 작가님의 어떻게 살 것인가 를 구매하기 위해 방문한 서점에서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발견했다.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만큼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두 권 모두 구매했다.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더 나은 내일을 고민하지만, 죽음에 대해 침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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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 의사인 저자 아툴 가완디도 의대에서 생명을 구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지만, 꺼져가는 생명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 때문일까. 어린 시절 내 주변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다 나을 거야" "10년은 더 살 수 있어"라는 용기를 주곤 했다. 그 염원과 기대는 무리한 연명 치료로 이어졌고, 그 결정에는 가혹한 고통이 뒤따랐다. 어린아이 눈에도 보이는 것을 어른들은 외면했고(외면하고 싶었고), 임종 직전에 가서야 "그동안 고생했어" '잘 가" "힘든데 이제 그만 가" 라며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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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소멸을 인정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감히 마지막 순간까지 무리한 치료로 생명을 연장하거나 타인의 치료를 독려하는 것이 그보다 더 위험하고 슬픈 일이라 말하고 싶다. 저자도 '아주 조금 나아질 가능성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뇌를 둔화시키고 육체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고통스러운 치료로 마지막 나날을 보내도록 만드는 것에 물음표를 던지며, 내려놓기, 어려운 대화, 용기라는 키워드 등을 통해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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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이 죽음 직전 치료나 케어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현대 사회 요양 시설의 한계점과 이를 개선하기 위한 좋은 노력들을 언급한다. 특히 나는 '생애 마지막 집' 을 통해 일생의 마무리를 돕는 요양 시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를 얻었다.


4장. 도움


노쇠한 사람을 돌보는 일은 일상 생활에서 엄청난 행위들을 요구한다. 루 할아버지를 간호하는 착한 딸 셸리도 24시간 가동하는 컨시어지, 운전기사, 스케줄 매니저, 약, 기계 관련 해결사, 요리사, 가정부, 안내원, 가계 수입원의 업무를 소화하는 것에 지쳐간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좋은 딸이 되고 싶었던 딸, 아버지가 행복하기 바랐던 딸 셸리는 아버지를 시설에 모시기로 결정한다.


셸리와 함께 살고 싶던 아버지의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더 이상 그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부분이 무척 마음아팠다. 나는 셸리처럼 모든 케어를 도맡았던 것은 아니지만,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한동안 모시고 지낸 경험이 있다. 좋은 손녀이고 싶은 마음에 기꺼이 하겠다 한 일이었지만, 하룻밤 새 7번씩 일어나 화장실을 모시고 왔다 갔다 하는 일상이 계속되자 나도 그것을 지속하기 힘들다고 느꼈다. 많은 이들이 가족을 돌보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 일이 절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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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자식(자손)이 많기 때문일까. 현대 사회에서 대가족이 아닌 경우 노인들이 통제와 감독이 이뤄지는 요양 시설에 지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집보다 안전하고 동년배들과 지낼 수 있는 공간이지만, 많은 노인들은 요양원에서의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안에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집'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3년 윌슨 부부가 만든 '노인을 위한 생활 주택' 은 환자를 수용하는 일반 요양원이 아닌 공동 주거 시설이다. 그곳 주민들은 스스로 자신의 일과 규칙을 정하고, 밤을 새우든 하루 종일 자든 본인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으며, 이성 친구를 집에 재울 수도 있었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이 싫다면 거부할 권리가 있었고 질병 치료나 생명 연장을 위한 치료 가이드라인을 미리 정할 수 있었다. 즉 스스로 보호 시설 안에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고안된 거주 공간이다.


윌슨 부부는 1988년 그동안 '노인을 위한 생활 주택' 운영 현황을 발표한다. 자료에 따르면 실제 그곳에 거주하는 노인의 우울증 발생 건수가 감소했고, 삶에 대한 만족도와 신체 기능, 인지 능력이 향상됐다.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안전과 위생, 노인의 자존감과 자아실현이라는 것을 만족시키는 시설을 구상하고 실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휠체어에 축 쳐진 채 복도에만 앉아 있어야 하는 시설,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목욕을 해야 하는 시스템. 잠이 오지 않아 TV를 보고 싶지만 규칙을 따르기 위해 불 꺼진 방에서 멀뚱멀뚱 눈을 뜨고 새벽을 기다려야 하는 공동 시설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진짜 집이라고 느껴지는 공간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무척 중요한 문제다.

이제 우리도 윌슨 부부의 시도처럼 이 사회의 새로운 '어시스트 리빙' 에 대해 고민하고 더 많은 노인들이 나를 잃지 않는 시설에서 삶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한 발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많지 않은 나이지만 가만히 앉아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질병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1) 가능성이 없음에도 작은 희망으로 무리한 치료를 받으며 중환자실에서 삶의 마지막을 보내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생각해 본 문제가 아니라 '같다'라는 표현을 썼다).

2) 내가 시설을 필요로 하는 노인이라면 욕창이나 체중 조절만 이야기하는 요양원보다는 원하는 시간에 밥을 먹고, 걷고 싶을 때 걷고, TV나 음악을 즐기고 싶을 때 즐길 수 있는 공간에서 삶을 정리하고 싶다.

3) 눈 앞에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 있다면 언제든 생명을 연장할지, 주어진 시간에 그저 고통과 불편함을 완화할 수 있는 치료만 받을지에 대한 선택지를 스스로 고르거나 미리 골라두고 싶다.


죽음과 소멸은 모두가 한 번은 감내해야 하는 순간이다. 내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 사회가 구성원들의 존엄한 마무리를 보장해 줄 수 있도록 우리들의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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