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혐오'하는 이유

『혐오사회_증오는 어떻게 전염되고 확산되는가』

by sue

혐오. 이 단어는 세상이 증오로 가득찬 것처럼 느껴질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가 되어버렸다.

그 익숙한 단어와 음울한 느낌마저 주는 빨간 표지에 이끌려 읽기 시작했다.


저자 카롤린 엠케는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다. 그녀는 이 책에 세상에 대한 깊은 통찰과 따뜻한 애정을 가진 지식인의 진심을 담았다. 작가 본인이 수많은 차별과 마주해온 성소수자이기 때문일까? 멀리서 관조하기보다 상황의 중심에서 호소하는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는 왜 혐오하는가?

일단 나에게 사로잡힌 자,

그에게는 온 세상이 아무 소용없나니,

영원한 어둠이 내려앉고,

태양은 뜨지도 지지도 않으니,

외부의 감각이 완전해도

내면에는 어둠이 자리 잡는다네.

온갖 귀한 보물이 있어고

자기 것으로 갖지 못하지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비극 제2부에서 근심의 말

개인적으로 혐오의 원인을 '걱정'이라 언급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왜 동성애가 싫어?"라는 질문에 "동성애를 합법화하면 세상이 얼마나 혼란스러워지겠어" "세상 망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자는 이런 '걱정하는 시민들' 은 본인들이 걱정하는 합리적 근거가 뭐냐는 질문을 회피한다고 말한다. 걱정한다는 사실 자체는 그냥 감정의 실체일 뿐 충분한 근거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함에도 마치 본인들이 이렇게 반응하고 그들을 막아야 세상이 유지되고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적어도 한 집단을 배척하고 사회적으로 고립시킬 만큼 중요한 일이라면, 합리적인 근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 근거를 '걱정'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수렴시킬 수 없다.

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판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다. 그렇다고 해서 합리적인 근거조차 없는 이들이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혐오'할 권리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시민들의 감정적 걱정을 부추기는 언론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도 한다. 언론인의 역할은 나 같은 일반 사람들이 사회적인 현상이나 특정 집단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임에도 독자들의 동조를 구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걱정의 원인과 대상을 분석하여 '걱정할 만한 것'에 대한 의견을 묻는 언론을 통해 논쟁이 공론화될 수 있다. 치열한 논쟁은 많은 경우 타인에게 이유 없이 '혐오스럽다'며 얼굴을 찌푸렸던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요구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

성소수자를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정말이지 작가가 내 옆에서 침을 튀기는 것처럼 호흡이 짧다. 지금까지 그녀가 겪어온 숱한 차별과 억압에 대한 분노가 압축되어 있다.

과거의 '순수' '참됨'에 대한 찬미는 현재의 것을 '타락' 하고 '부패' 한 것으로 규정한다. 세상이 금방이라도 몰락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타락한 사람이 되버린 성소수자들은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본연의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전통적 관념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혐오의 존재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나도 부끄러운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친한 친구가 와서 물었다.

"여자가 여자 좋아하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 "더러워"

나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더럽다는 단어가 튀어나왔고, 어떤 감정을 느껴서 그런 답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년 정도 지났을까. 그 친구가 내가 장문의 편지를 쥐어줬다. 본인이 사실은 여자를 좋아하게 됐는데 내가 너무 단호해서 말할 수 없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친구니까 이야기해주고 싶었다는 내용이었다.

친구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통해 나는 한 발 나아갔다. 그들을 '인정'하고 말고는 내 소관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고, 타인의 관계와 사랑을 '존중'했다.

작가는 누군가를 인정한다고 해서 내 스스로가 피해 입지 않는다고, 내 주변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안심시킨다. 내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면 사회가 혼란스러워 지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책에는 '복수로 존재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각자의 개인성과 독특함을 서로 존중한다는 것은 의미한다' 는 문장이 있다. 모두가 같기를 바랄 필요는 없다. 다른 이들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포용해야 다수의 특성과 다르지만 더없이 소중한 나의 어떤 부분들도 보호받을 수 있다. 혐오보다는 존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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