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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Mar 06. 2020

3. 어설펐지만 완벽했던 접대

별의별 의료기기 김땡땡 영업사원

병원 카페에 앉아 메일함을 열었다. 사업마케팅팀에서 보낸 당월 매출 시트가 보인다. 하늘로 치솟은 선배들의 것과 달리 모니터 바닥으로 축 처진 내 그래프가 눈에 들어온다. 한숨밖에 안 나온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보다. 영업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났으니 아직 업무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는 말도 스스로를 깎아먹는 변명으로 여겨질 것이다.

출처 = unsplash.com


심각한 고용 불안에 시달리며 멍하게 시트를 응시하고 있을 때 산부인과 김교수님으로부터 문자 한 통이 왔다.

그때 저녁 식사 이야기했죠? 그거 이달 말에 강남 쪽에서 B병원 김진서 교수, C병원 이정수 교수 이렇게 같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대학 동기거든.


예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첫날부터 늘 퉁명스럽던 그가 이번에는 내 매출 그래프를 좀 들어 올려 주려나 보다. 몇 달간 너스레 떨며 식사 좀 대접하게 해달라고 졸라댄 보람이 있었다.


네 교수님! 당연히 가능합니다! 괜찮으시다면, C병원은 담당자가 따로 있어서 그쪽 담당자도 같이 해서 자리 한 번 마련하겠습니다. 강남 쪽에 좋은 곳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한 시간은 걸릴 테니 당일에는 제 차로 모시겠습니다. 교수님!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밥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는 마지막 문장에 씁쓸한 미소를 한 번 지었겠지만 지금 난 절박하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샘솟았다.

출처 = unsplash.com

일주일 전부터 접대 준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의국 전체 회식 서포트를 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친분이 있는 다른 병원 교수님들과 어울려 식사를 대접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C병원 담당자인 회사 선배와 함께 바쁜 교수님 교수님 세 분의 스케줄을 맞추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계속해서 엇갈리고, 장소 예약도 순조롭지 않았다. 하지만 김교수님이 마음만 열면 무엇이든 챙겨주려는 고객이라는 소문이 내게 힘이 되었다. 가까스로 교수님들의 스케줄을 조율하고, 영업 사원 사이에서 유명한 강남의 고급 룸 일식집 한 곳을 예약했다.


접대 당일이 다가왔다. 낮부터 세차장으로 향했다. 햄버거 냄새와 온갖 쓰레기로 가득한 차에 교수님을 태우고 싶지 않았다. 차량 에스코트를 자원한 만큼 최고급 세단은 아니더라도 그만큼의 쾌적한 느낌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깜빡이를 거꾸로 켜는 초보운전이지만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이다.


세차를 마치고 차 안에 누워 있으니 문득 이 좁은 차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며 가야 할지 걱정이 됐다. 한 시간 동안 나보다 30살이 많은 아저씨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제품 이야기를 할 수는 없고,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다. 한참을 고민하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음악 뭐 좋아해?"

-"이문세 꺼 듣지 뭐."

"아빠 친구들은 이문세 꺼 들어? 나 오늘 교수 한 명 태우고 강남까지 가야 돼. 이문세 음악 틀고 갈까?"

-"뭐 음악 좀 틀다가 멋쩍으면 라디오를 작게 틀어놔. 크게 말고 은은하게. 그 사람이 관심 있는 주제면 잠깐 들린 내용에 대해서도 먼저 이야기 꺼낼 거야. 사회든 정치든. 그때 너 의견을 말하기보다 잘 듣고 공감해줘 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 나이 상관없이 가까워질 수 있다. 음악보다 난 그게 좋을 것 같은데."


라디오 채널을 찾아 은은하게 틀어봤다. 이제야 마음이 조금 놓인다.


'잘할 수 있겠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사실 난 초보운전이고 룸에서 하는 소규모 접대도 처음이었다. 대화를 너무 주도해서도 안 되고, 너무 듣기만 해도 안 된다며 되뇌고 있을 때쯤 멀리서 김교수님이 다가왔다. 이번 분기 내 매출을 책임져 줄 다크호스.


"뭘 또 운전까지 해준대. 내가 택시 타면 되지. 그래도 고맙네. 갑시다."


6시를 알리는 라디오 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병원 출구에서 깜빡이를 반대로 켰다.

출처 = unslash.com

"여기서 좌회전이 가능한가?"

- "우회전할 겁니다 교수님~"


"그런데 왜 왼쪽 깜빡이를 켰어?"

- "아 네. 이제 바꾸려고 합니다."


"운전면허 딴지 어떻게 돼?"

- "영업 시작할 때 땄으니 3개월 됐습니다."


"강남... 갈 수 있겠어?"

- "네 연습 많이 하고 왔습니다."

"그래그래.. 어어!!!!! 앞에 차 보고 가야지."


초반 깜빡이 실수 때문 탓인지 긴장이 심해졌다. 브레이크를 밟는 일도, 길을 찾는 일도 평소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교수님은 흘러나오던 라디오 볼륨을 줄이고 내게 운전 연수를 해주기 시작했다.

"잘했어. 이제 깜빡이 켜고 우측 들어가 봐. 옳지. 핸들을 스무~스하게 돌려야지 브레이크도 되도록 안 밟는 게 좋고. 옳지. 잘하네 내가 괜히 걱정했네. 아 그런데 지금 들어가면 너무 늦었지. 그래 괜찮아."

민망한 순간이 연속됐다. 그때마다 지금까지 늘 차갑게 날 지나쳤던 교수님이 짜증한 번 내지 않고 자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힘겹게 강남 진입로에 들어설 무렵 교수님께 전화 한 통이 들어왔다. C병원 이정수 교수님인 듯했다.


뭐? 예약이 안 되었어?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김 땡땡 씨, 회사 이름 별의별 의료기기 아닌가? 예약자 이름을 뭐로 했어?"

그때서야 바보처럼 예약을 내 이름으로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교수님 죄송하지만 제 이름 김 땡땡으로 예약을 했습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은 김교수님이 박장대소를 하며 말했다.

"아니 우리가 다 알게 별의별 의료기기라고 해야지. 다른 병원 교수가 자네 이름을 어떻게 알아! 이런 접대 처음이었나 보네. 괜찮아. 괜찮아. 오른쪽 깜빡이 켜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우리도 도착이네. 왼쪽 깜빡이 말고."

정말  자신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렵게 모인 교수 세 명과 C병원 담당자까지 다섯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교수님들께 인사를 마치고 술을 한 잔 두 잔 마셨다. 김교수님은 운전도 못하면서 본인을 태워주겠다고 했던 내가 귀여웠는지 다른 교수님들에게 '나를 뭐든 하려고 하고 노력하는 젊은 친구'라고 소개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교수님들은 은근슬쩍 A병원 이교수랑 정교수가 수술이 많아지고 있다거나. B병원에는 이번에 한교수가 병원장이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있다거나. C병원 민교수가 최근에 최교수랑 다퉜는지 영업사원이 최교수한테 더 잘해주면 그 영업 사원은 상대도 안 해주더라.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주었다. 뼈가 되고 살이 되고 결국에는 매출이 될 이야기들이었다.


코스 요리가 마무리되고 일품 진로 3병까지 동이 나자 얼큰하게 취한 김교수님이 자리를 마무리했다. 비틀거리면서도 "아이고 수고했네. 수고했어."를 반복했다.

교수님들이 탄 택시가 사라지자 안도와 보람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전에는 접대를 하고나면 마음이 휑하고 왠지 모를 억울한 마음이 올라올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온화하게 운전을 가르쳐주시 교수님의 인간적인 모습보았고, 그런 그에게 내가 재주는 없어도 얼마나 영업을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도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 unsplash

대리 기사님 뒤에 앉아 김서린 창밖을 바라보니 내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처음에 인사하러 왔을 때 너무 냉랭하게 대한 것이 늘 미안했네.
또 봅세. 앞으로도 운전 조심히 하ㄱㅎ

접대만 잘하면 내 물건 좀 사주겠지.

접대만 잘하면 매출 좀 올려주겠지.

술에 많이 취한 김교수님의 오타 섞인 문자를 보니 그저 매출만 생각하며 오늘을 준비했던 것이 조금은 미안해졌다.

교수님 제가 더 잘 하고 싶었는데 많이 부족했습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서툰 점이 많습니다.
바쁘고 피곤하신 것 알면서도 외래 끝날 때마다 찾아가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또 찾아뵙겠습니다.

접대란 결국 사람끼리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매끄럽지 않았어도 마음이 통했다면 그 목적을 다 이룬 하루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어설펐지만 완벽했던 접대 덕에 고객 한 명을 얻었다.


ps. 별의별 의료기기 김땡땡 영업 사원의 이야기는 기억에 상상을 더했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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