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의별 의료기기 김 땡땡 영업 사원의 이야기
매출로 보여주겠다며 영업팀으로 옮긴 지 6개월이 되었다. 고객을 보고 너스레만 떨면 영업왕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영업을 해보니 신규 고객 유치는커녕 기존 고객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당연히 매출도 요지부동이고.
모닝커피 배달이나 손편지보다도 강력한 액션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난 그 '액션'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외과 의료기기를 판매하는 영업 담당자로서 해내야 하는 일인 줄 알면서도 애써 회피하고 미뤄온 일이었다.
제품이 실제로 사용되는 현장에 가서 고객을 만나고 경쟁사 동향도 조사해야 한다는 말은 귀에 딱지가 박히도록 들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피만 보면 헛구역질을 하고 머리가 뱅뱅 돌아 비틀거렸던 내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 수술방에 안 들어가도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나만의 영업 비결을 찾을 줄 알았다.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오늘 동료들의 매출 달성률에 한참 못 미치는 나의 숫자를 보니 힘이 빠지고 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든다.
이제는 다른 영업 사원들처럼 수술방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마침 멀리서 요즘 나와 사이가 돈독해진 김민수 교수가 걸어온다.
"교수님! 잘 지내셨죠~ 이번에 신제품 나온 거 사용해보시니까 어떠세요? 제가 실제로 수술하시는 거 보면서 피드백도 듣고 두경부 수술 쪽 공부를 좀 하고 싶은데, 한 번 들어가도 될까요?"
의사들도 결국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니까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표현에 반응을 할 것 같았다.
- "열심히 하네! 그래요. 내일 두경부 오픈 케이스 있으니 들어와~"
나이스.
나 이제 정말 수술방에 들어가는 건가?
탈의실에서 빳빳하게 세탁된 간호사복을 입고 마스크와 급식 아줌마 빵모자까지 쓰니 실감이 난다.
다른 영업사원이었다면 수술방에 들어간 김에 경쟁사 기계가 몇 대 들어와 있는지 의사들이 어떤 수술을 얼마나 하고 있고 어디 제품을 쓰고 있는지 스파이처럼 살피고 메모를 했겠지만 오늘은 무리하지 않고 수술방에 익숙해지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괜히 무리하다가 수술 중에 영업 사원이 혼절을 하는 일이 벌어지면 안 될 테니까.
입구부터 꽤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세균 감염 방지를 위해 온도가 늘 20-24℃ 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긴장한 탓인지 이까지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복도까지 들려오는 장비들의 불규칙한 알람 소리와 방금 전신 마취에서 깨어난 환자들의 고통 섞인 울음소리에 눈길을 주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이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날이 올 것이라 다독이며 김민수 교수가 수술을 집도하는 11번 수술방에 도착했다. 마침 수술을 위해 손 소독을 마치고 걸어오는 김민수 교수님을 만났다.
- "시간 잘 맞춰서 왔네. 들어와. 이제 수술 시작하니까. 지금 시작하는 게 침샘 제거하는 수술이거든. 신제품 사용해서 할 거니까 들어와서 잘 봐. 내가 왜 불편해서 못쓰겠다고 하는지도 오늘 보여주면 되겠다!"
"(침샘을.. 제거한다고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많이 배우고 제품 피드백도 잘 받아서 본사에 전달하겠습니다!"
교수님은 내게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불편한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전신 마취로 깊은 잠에 빠진 환자 앞에 서서 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징그러운 일이 아니다. 할 수 있다.'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보비라고 불리는 작고 뜨거운 전기 장치가 환자의 오른뺨 아래쪽으로 향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고무를 불판에 구울 때나 날 것 같은 낯선 냄새가 마스크 안으로 스며들었다. 당장 구역질이 날 것 같아 속을 다스리고 있는데 교수님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 "이제 다 오픈했으니까 가까이 와서 봐요. 여기가 침샘이거든. 보여? 응? 이걸 절개하고 꺼내는 수술인데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아."
교수님의 따뜻한 배려 덕에 얼굴이 반쯤 열려있는 환자 가까이로 다가갔다.
"(멀리서 보고 싶어. 제발 나를 부르지 마. 사실 난 침샘이 어디 붙어있는지 볼 상황이 아니에요.) 네! 가까이 가서 봐도 될까요? 수술대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아아 교육받을 때 침샘 제거하는 영상 본 적은 있는데 실제는 처음이에요. 저희 장비가 이 단계부터 사용되는 것이 맞지요?"
- "어쭈 김 땡땡 씨라고 했나? 공부 좀 하고 왔네? 가까이서 잘 들여다봐요."
김 교수님은 학구열에 불타 보이는 내 모습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는 환자 얼굴이 열리고 닫히는 2시간 반 동안 날 옆에 두고 수술 부위를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설명하고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꼼꼼하게 전해주었다. 새빨간 피가 싫어 공포 영화를 보지 않는 나는 영혼이 반쯤 나가 있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잠시라도 틈이 나면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아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메모를 했다.
선배가 참관 중에 환자 출혈 때문에 수술 상황이 심각해지면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지니까 눈치껏 나오라는 조언을 해주었는데 다행히 이번 수술은 모든 것이 무난하게 끝난 듯했다. 수술복을 벗고 휴게실로 향하던 교수님이 나를 향해 이야기했다.
- "아까 수술 중에 이것저것 적던데 많이 배웠어요?"
"네! 교수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실제로 수술 케이스 보며 제품이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더 많이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정말입니다! 제품 관련해서 주신 피드백은 오늘 중에 정리해서 본사 담당자에게 전달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나도 장비 파는 사람들이 많이 알고 추천도 하고 나쁜 점 개선도 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런데 그런 사람이 많이 없더라고. 수술방 들어온다고 해서 들어오라고 하면 쓸데없는 소리나 많이 하고 말이야."
교수님은 지금껏 수술방까지 와서 접대나 제품 사용 시 회사에서 줄 수 있는 혜택을 늘어놓는 영업사원들에게 다소 지치고 실망을 해온 듯했다. 자연스레 수술 중 교수님 말을 받아 적은 빽빽한 메모를 보여드렸다. 영업 사원에 대해 다소 낯을 가리던 교수님의 눈빛이 성실한 학생을 보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난 그저 수술에 대한 걸 적는 것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할 정신이 없었던 것인데 그 덕에 고객 한 명은 확실히 잡은 것 같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교수님이 다음 말을 이어가기 전에는.
"정말 수술 내내 열심히 듣고 적었네요? 오늘은 한쪽만 조금 열고 하는 거라서 금방 끝났어. 다음 주에는 얼굴 전체적으로 수술 필요한 환자가 있어서 수술 스케줄 잡을 거니까 그때 또 들어와요. 연필이랑 메모장 들고! 수고했어요."
와. 밥 벌어먹기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