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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e Nov 27. 2019

1. 교수님 커피 배달 왔습니다.

별의별 의료기기 김땡땡 영업 사원의 이야기

모닝커피를 돌리는 수요일이다. 우리가 배달의 민족이라 그런지 매주 수요일은 나도 고객들에게 커피 배달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공식적인 출근 시간은 8시 30분이지만 오늘 같은 날은 7시 반 전 병원에 도착해야 음료를 사고 함께 전할 손편지 다섯 줄 정도 쓸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다.

다행히 7시에 병원에 도착했다. 화장실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부지런히 지하 1층 카페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이 네 잔의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딸기 생과일주스 한 잔을 주문했다. 생과일주스는 평소 커피를 마시지 않는 고객한 분을 위한 특별 음료다.

주문한 음료가 나올 때까지 '정성이 가득 담긴 것처럼 보여야 하는' 손편지를 써 내려갔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번 주도 진료와 수술로 많이 바쁘시지요?
더 자주 인사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늘 죄송합니다.
오늘도 기분 좋게 하루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언제든 말씀 주실 부분 있으시면 편하게 연락 주셔요 :D
- 별의별 의료기기 김땡땡 올림

아빠 나이의 아저씨에게 매주 날씨, 건강 관련 문장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쪽지를 쓰는 일도 참 고역이다. 마스크 챙기라는 메시지를 한 줄이라도 더 쓸 수 있도록 얼른 봄이 왔으면 좋겠다. 손편지를 다 써갈 때쯤 음료가 나왔다. 매번 여러 잔의 음료를 주문하다 보니 이제는 카페 사장님도 나를 알아보고 쪽지를 완성할 때쯤 음료를 내어주셨다. 영업 사원이 많이 오는 카페라 그런지 사장님의 눈치가 무척 빠르다. 사장님과 나의 팀워크가 완성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오후에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들 간식도 이 카페에서 구매해야겠다.


다섯 잔의 음료 홀더에 대문짝만 한 회사 로고가 박힌 스티커를 붙였다. 별 것 아닌 디테일에 괜스레 뿌듯해진다. 어느덧 교수님이 있는 2층 외래 진료실 앞에 도착했다. 담당 고객이 한 명인데 음료가 다섯 잔인 이유는 간단하다. 교수님이 출근하기 전 진료실에 커피와 손편지를 놓고 나오려면 간호사들의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빈손이면 일이 좀 어려워진다. 영업 초짜일 때는 일면식 없는 간호사 선생님에게 교수님 드실 커피를 좀 놓고 나와야 해서 진료실에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왜 진료실에 들어가시겠다고 하세요? 진료 곧 시작하니까 나가세욧!!"

이를 계기로 진료실에 들어가려면 그들의 호감부터 얻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간호사 선생님들의 배려(혹은 아메리카노) 덕분에 교수님 책상 위에 생과일주스 한 잔과 손편지를 올려놓을 수 있었다. 물론 내 직업이 배달원은 아니니 팀장님께 커피만 놓고 고객과 미팅 콜을 했다며 보고할 수는 없다. 준비한 커피는 진료실에 두고 연구실에서 진료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교수님을 기다렸다. 멀리서 나의 고객! 이 병원의 명의! 김민수 교수님이 걸어오신다. 다행히 밝은 모습이다. 표정이 안 좋으면 그냥 피하는 게 상책인데 오늘은 인사를 해도 될 것 같다.

예상대로 웃으며 아침 인사를 받아주셨다. 김 교수님은 내가 처음 이 병원 담당자가 되었을 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분이다. 90도 인사를 해도 쓱 지나치시더니 세 달간 매주 같은 요일 같은 시간 커피 한 잔과 함께 얼굴을 비추자 우리 교수님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인사도 받아주고 내게 미소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놀랍게도 오늘은 교수님이 먼저 저녁을 한 번 먹자는 말을 남기고 진료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우리 회사가 사준 커피와 손편지가 교수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스 타이밍.


밥을 한 번 먹자니!

지성이면 감천이 맞나 보다.

이 맛에 내가 영업을 한다. 인센티브에 한 발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영업을 시작했을 때 음료 대 여섯 잔에 빨대를 꽂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내 모습을 보며 회의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이렇게 해야만 물건을 팔 수 있는 것인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소위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것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별다른 묘안을 찾지 못했다. 어쩌면 경험이 부족하고 고객과 관계가 돈독하지 않은 내게 커피 외에 대안이란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초반에는 커피를 돌리는 것도 짜증 나는데 빨대 비닐은 또 왜 이렇게 잘 안 까지는지... 늘 불만 투성이었다. 하지만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못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상황에 따라 영업 사원이 어쩔 수 없이 취해야 하는 자세나 행동이 있다는 사실받아들였다. 1년이 지난 지금은 늘 실패 없이 빨대 비닐을 깔끔하게 벗길 만큼 커피 배달에 익숙해졌을 뿐 아니라 커피 덕에 고객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고 매출을 올릴 수 있어 감사함을 느끼는 영업 사원이 되었다.

마음을 조금 내려놓으니 지갑이 두둑해졌다.

이제 나도 어른인 건가?


ps. 별의별 의료기기 김땡땡 영업 사원의 이야기는 기억에 상상을 더했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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