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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서기 Sep 20. 2023

내 공간을 가져보려고 5

나는 아직 피해자가 아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북부지사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런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통화를 하거나 검색을 하거나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였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며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내 상황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나씩 적어내려 갔다. 


1.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왔다. 

2. 나는 100% 반환되는 보증보험에 가입되어 있다. 

3. 보증보험으로 내 돈을 돌려받기 위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확인하고 싶다. 

4. 내가 절대 놓치면 안 되는 시간과 행정은 무엇인가? 


내가 쓴 글을 다섯 번 정도 반복해서 읽을 때쯤 내 대기번호가 호출되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상담사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수첩에 적어놓은 문장들을 또박또박 읽으며 내 상황을 전달했으면 좋았겠으나, 막상 그 자리에 앉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계속 '어......', '그러니까......'이런 말들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미 나와 같은 사례가 많았는지 나의 횡설수설에도 상담사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내가 준 전세계약서를 확인하고 다음과 같이 내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해 주었다. 


나는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나는 전세사기 피해자가 아니다. 


이것은 보증보험으로 돈을 쉽게 돌려받게 될 거란 뜻이 아니었다. 내가 상담사를 만난 건 전세계약이 7개월이나 남은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전세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다. 혹시라도 7개월 후에 집주인이 전세금을 돌려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나는 예비 피해자일지는 모르지만 
현재 전세사기 피해자가 아니었다.  


상담사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화가 나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내 불안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검색창에 집주인 이름을 치고 '전세사기'라고 검색하면 나와 같은 피해자들이 올린 글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50여 채의 집이 이놈 명의라고 했다) 심지어 피해자들이 모인 단톡방까지 만들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피해자가 아니었다. 


일단 상담사는 전세일자가 종료되기 전까지 사전에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들을 마치 십계명을 받은 모세처럼 소중히 안고 그곳을 나왔다. 


1. 집주인에게 전세계약 종료 시 집을 나가겠다는 의사전달 할 것 

2. 은행과 이야기하여 전세대출 기한을 최대한 연장할 것 

3. 주택임차권등기명령신청서를 법원에 전달할 것 


집주인에게 전세계약 종료 의사전달이 가장 우선이었다. 하지만 집주인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연락한 곳이 해당 집을 구매하고 싶으면 연락하라는 번호였다. 그리고 내가 받은 답장은 위와 같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진짜 진짜 나쁜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세사기로 문제 된 집을 아예 인수하려면 연락하라고 해놓고 막상 그들은 집주인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그럼 대체 어떤 자격으로 나에게 이 집을 매매하는 것인가? 


그들은 나에게 집을 인수하고 싶으면 3천만 원을 내라고 했다. 

나는 보증보험이 있으니 버티지만, 보증보험조차 없는 사람들은 아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집을 인수하는 수 박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전세계약을 할 때부터 전세사기를 치는 동안에도 나에게 철저히 '갑'의 위치에 있고자 했다. 


결국 내가 집주인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은 '내용증명' 발송이었다. 하지만 집주인의 주소를 모르는 나는 일단 전세계약서에 있는 집주인 주소로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그렇게 나에게 가장 큰 평안을 주고 안정을 주었던 내 집은 가장 불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아무리 재미있는 것을 보고 웃다가도, 그 끝에 알 수 없이 불안해지는 숨 막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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