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전 연애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내게 조심스레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설렘보다는 부담이 먼저였지만, 그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의 투명한 진심 앞에서 천천히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는 늘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눈빛도, 말투도, 작은 행동도 모두 진심이었다. 마치 ‘사랑은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듯 행동하던 사람. 그 진심은 고마웠고, 때론 위로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둘 다 타지에서 외로운 시기를 지나던 중이었고, 서로가 서로의 기댈 곳이 되어주려 했다. 그래서 더 빠르게 가까워졌고, 그래서 더 쉽게 기대게 됐다.
하지만, 그 다정함은 섬세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이길 바랐다. 좋아하는 마음과 잘 맞는 관계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내 공간에 머물러도 조금만 조심해줬으면 하는 디테일들이 자꾸 놓였다. 머리카락이 흩어져 있거나, 물건을 아무렇게나 쓰는 식. 그런 사소한 것들이 나에겐 ‘불편함’으로 계속 쌓였다.
사실 처음엔 그런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 잘하려는 모습이 보였고, 꽤 섬세하고 야무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까워질수록 칠칠맞고 둥글둥글한 본모습이 드러났고, 그게 나에겐 점점 더 거슬리는 지점이 되어버렸다. 사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점점 더 편해졌고, 옷차림도, 말투도, 태도도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아마 그에겐 그게 애정 표현이었겠지만, 나에겐 ‘가까워졌다’기보다는 ‘느슨해졌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점점 더 편하게 대해줄수록, 나는 점점 더 불편해졌다. 기분 상할 만한 상황은 늘 그를 통해 생겼고, 그게 반복되면서 우리는 자꾸만 어긋났다.
좋은 점도 많았다. 그는 똑똑했고, 대화할 이야깃거리도 많았고, 데이트도 늘 흥미롭고 다채로웠다. 하지만 그건 ‘좋은 사람’의 자질이지, ‘나와 잘 맞는 사람’의 조건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문제는, 그 최선이 늘 ‘자기 방식대로’였다는 것.
내가 불편하다고 느끼는 지점은 설명하기도 애매했고, 그에겐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지쳐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나 역시 그가 불편해하는 어떤 부분에서도 끝내 충분히 양보하지 못했다. 서로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우리는 ‘맞춰가기’보단 ‘안 맞는 걸 확인하고 끝낸’ 연애를 했다.
그는 여리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관계에 에너지를 많이 쓰는 그런 사람. 그게 그의 방식이고 성향인 건 알지만, 나는 그런 리듬과 결이 자꾸만 맞지 않았다. 그게 단지 성격 차이라고 넘기기엔, ‘함께 살아가는 관계’에 있어선 꽤 본질적인 지점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 나는 더 확신하게 됐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을 단순히 ‘많이 받는 것’보다, ‘그 사랑이 나와 결이 맞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마음을 열어봤지만 결론이 이렇다면, 그냥 내 까탈스러움을 인정하며 살기로 했다.
편안함보다, 치밀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찾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이상형의 중간 어딘가에서 타협하듯 시작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게 욕심일지 몰라도, 무엇 하나를 감수하고 시작하면 결국엔, 그 감수한 지점이 내 삶의 불행이 될 것 같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혼자 사는 쪽이 더 평온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