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의 꽃시장, 예술문화센터, 떠남 속 떠남
방콕의 꽃시장 '빡크롱 마켓(Pak Khlong Market)'에 가고 싶었다. 해외에서도 길치력은 어딜 가지 않아서 구글맵이 바로 앞에 있다고 표시해주는 버스 정류장을 못 찾아서 툭툭을 잡았다.
플라워라 말해도, 빡크롱이라 아무리 말해도 나의 발음과 억양은 영어도 태국어도 아닌 것으로 들리는지 기사님은 아리송한 표정이었다.
꽃시장, 그 단어 하나가 간절했다. 다행히 마침 지나가던 젊은 기사님이 우리의 불통을 목격하고 도움을 주셨다. 언제나 수월하지 않은 낯선 길, 낯선 나라, 낯선 언어.
불통을 겪고 나자 한 사람이 생각났다. 프랑스식 영어와 한국식 영어. 우리는 같은 언어를 구사했지만 잘 통하지 못했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나에게 말을 건 그를 경계했지만 마침 대화가 궁했던 터라 맥주 한 잔 하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알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거리의 소음 속에서 목소리도 잘 듣기 힘들었고 실없는 대화와 맥주 잔만 나누고 헤어졌다. 손 인사를 하던 순간, 그가 내일 저녁밥을 같이 하자고 제안해왔다. 같은 상황에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서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다음날 저녁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뜻 모르게 다가오는 이에게는 벽을 하나 더 세우는 나다.
약속했던 저녁이 지나고 그 이튿날 아침에 산책하던 거리에서 거짓말처럼 그 사람을 마주쳤다. 너무 당황했던 나는 떠듬떠듬 식은땀을 흘리며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변명을 만들어내야 했다.
결코 편치 않은 작별 인사를 고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데 난데없이 그가 작별의 키스를 요구했다. 어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갑작스러운 전개에 기분이 상했다. 그가 참 비루해 보였다.
차가운 눈으로 끝맛이 참 쓴, 영원한 안녕을 고했다. 그리고 갈까말까 고민했던 방콕 예술문화센터로 향했다. '예술이 삶을 구원한다.'는 오래된 명제를 되뇌이며 기약 없이 그림과 사진 속을 거닐었다.
"그러나 운명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롭지는 않다. 우리가 생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이 우리를 형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기치 않았던, 때로는 소망치 않는 방향과 형식 속에 생이 형성해 놓는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따가운 햇볕 아래서 걷고 땀 흘리고 잠깐 그늘에서 쉬며 가져간 전혜린의 에세이를 읽다가 다시 걷고 걷고 걷고. 걷는 법을 다시 배우는 사람처럼 열심히 걸었다.
등에서 배어 나온 땀에 배낭에서 시큰한 냄새가 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어느 순간 사람도 떠나고 풍경도 떠났다. 땀 냄새보다 견딜 수 없었던 건 멈춘 시간과 그 안에서 길 모르고 우두커니 선 나였다. 다른 시공간에서는 다른 것이 나를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날 밤, 방콕을 떠나 치앙마이로 향하는 야간열차에서 잠과 깸을 반복하며 다시 어딘가를 향해 떠난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도착하는 즉시 다시 떠남을 골몰하는 이상한 여행자는 이 감정이 여행만의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성질일지도 모르겠다는 메모를 남겼다.
'도착과 머무름은 또 어딘가의 고인 물이 되는 것만 같아 두려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