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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ON Oct 17. 2021

2000년 미국 대선, 팜 비치 투표지에 담긴 오류

오류를 유도할 여지가 있는 조건을 제거하라


극히 이례적인 이번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누가 승리할 것인가가 아니라 미국인들이 그 승자가 공정하게 뽑혔다고 인정할 수 있는가에 있다.
-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2000.11.10


[출처] 연합뉴스

2020년,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긴 투표용지가 등장했다. 제21대 국회의원을 선거하는 자리인 4.15 총선 당시 비례대표 선거 참여 정당이 35개가 되면서 이를 다 담기 위해 길어졌던 투표용지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용지의 길이가 48.1cm에 달했던 만큼 투표지 길이를 줄이기 위해 기표란의 세로 폭이 불과 1cm로 설정되었고, 기표란 사이 여백이 0.2cm로 좁아졌다.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무리 없이 원하던 정당에 투표할 수 있었을 테지만, 시력이 불편하신 분들은 많아진 정당과 좁아진 여백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엄청난 길이의 투표용지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이와는 다르게 후보자 확정이 연기되고  후보 정당 간에 법정 싸움으로까지 휘말리게 만들었던 표지가 있었다. 2000 미국 대선의 플로리다주  비치의 투표용지가 바로 그것이다.






2000년 미국 대선, 팜 비치에서 벌어진 일     

[출처] Unsplash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와  고어 민주당 후보가 겨뤘던 2000 미국 대선 당시 플로리다주의  비치 사건은 미국 정치상 ‘투표지 디자인으로 인해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던 전무후무한 대사건이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제도는 주민들의 직접 투표로 당락이 결정되는 것이 아닌, 인구 비례에 따라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의 수를  주에서 득표를 가장 많이  후보자가 가져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플로리다를 제외한 나머지 주에서 민주당  고어 후보는 255, 공화당 조지 부시는 245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한 상태였고, 따라서 25명의 선거인단을 가지고 있는 플로리다주의 결과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판세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일었던 지역은 팜 비치(Palm Beach)라는 카운티였다. 팜 비치는 전통적으로 민주당이 우세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표가 매우 적게 나왔다. 이 부분도 의아했지만, 더욱 의구심이 들었던 부분은 조사 결과 또 다른 후보였던 개혁당의 팻 뷰캐넌에게 이상하리만치 많은 표가 몰렸다는 점이었다. 이는 타 지역에 비해 무려 세 배나 되는 결과였다고 한다.     


유권자들은 해당 결과가 어디서부터 야기됐는지를 추적하던 , 플로리다주에서 유일하게  비치에서만 사용됐던 ‘투표지 초점을 추게 되었다. 문제의 투표용지는 플로리다 전체 67 카운티 중에서 유일하게  비치에서만 썼던 디자인인데, 다른 곳들과 다른 디자인이었고, 타 카운티들과 다른 결과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팜 비치 투표지엔 어떤 오류가 있었을까

[출처] Anthony(W)

위의 이미지가 문제의  비치 기표용지다. 이러한 디자인을 ‘나비(Butterfly) 투표지라고 칭하는데, 중앙을 기준으로  측에 후보 명단이 쓰여 있으며 투표는 가운데에 하는 방식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나비형 투표디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는지 전체적으로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1 후보인 조지 부시에게 투표하려면 용지 가운데  번째 구멍을 선택하면 된다. 하지만  아래 구멍들부터는 누구를 투표하는 구멍인지 눈을 크게 뜨고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만 한다. 유심히 보지 않는다면, 유권자 스스로도 모르게 잘못된 선택을  수도 있기에 대단히 주의해야 하는 디자인이기도 하다.      


2 후보인  고어는  번째 구멍에 지정되어 있고,  번째 구멍은 오른쪽 상단에 있는  캐넌에 할당된 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번째 번호였던 부시 후보만 이름과 구멍 순서가 같았고, 고어 후보부터는 잘못된 조합 가능성이 유도됐던 디자인이었다고   있다.     


해당 기표용지를 선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30년 동안 선거 관련 부서에서 일해온 정통 선관위 관리인 민주당원 소속의 테레사 르포어였다. 그는 ‘한쪽에 10명의 대선 후보를 모두 기재할 경우 글씨가 작아져 노인들이 알아볼 수 없을까 봐 양쪽으로 나눴다’고 해당 디자인을 선택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덧붙여 선거일 이전에 이 투표용지를 공개했고 의견 수렴 과정에서 반대도 없었기에 이러한 논란이 일어날 거라는 예측을 상상하지조차 못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투표 결과가  디자인이 명백히 잘못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캐넌 후보가 이곳에서 얻은 표는 플로리다주 전체 67 카운티에서 얻은 득표의 20% 넘는 3,407표였다.  수는 그가 플로리다주를 통틀어 얻은 표의 5분의 1 해당할 만큼 높은 수치였고, 인접한 브로워드 지역 789표와 마틴 지역 108표와 비교했을   비치 투표에 이상이 있다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또한 플로리다 주법은 투표용지를 만들 때 후보 이름의 오른쪽에 기표할 공간을 마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팜비치 투표용지는 이를 위반하기도 해서 논란이 더욱 크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공화당 측은 이런 용지가 지난 1996년 선거에도 사용되었으며 이번 선거에선 민주당 측 선관위원도 합의했으며 주에도 보고해 사전에 승인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오류를 유도할 여지가 있는 조건을 제거하라

[출처] interaction-design.org

세계적인 UI 전문가 제이콥 닐슨이 주장한 <UI 디자인의 8가지 원칙> 나온 규칙  하나다. 투표용지는 별도의 설명 없이  자체로 유권자가 자신이 원하는 후보에 즉각적으로 투표할  있도록 정보를 얻을  있는 디자인이어야 하지만,  비치의 기표용지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후보자 명단을 좌우로 분리해놓고, 다시  정보를 조합해 가운데 있는 구멍에 기표해야 된다는 복잡한 디자인이었기 때문에 유권자의 상당수는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교적 시력이 좋지 않고 즉각적인 판단 능력이 부족한 노년 인구들에게는 더더욱 높은 장벽으로 느껴졌을 테다.


공화당 측에선 “기표용지엔 화살표로 후보를 명확하게 표시해주는 시각적 장치가 있었다라고 주장하지만, 철저히 공급자 측면에서 제공하는 시각적 장치가 바람직한 인지에 대해선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수요자인 유권자 측면에선 이를 결정적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름과 구멍 순서가 같을 것이라는 유권자들의 ‘평소 인식하는 경험에 의거한 매핑력  강하게 작용할  있기에 공급자 위주의 디자인은 예측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올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바람직한 디자인(UI)이라면, 인간이 무의식  가지고 있는 ‘매핑력’,  사고 회로까지도 모두 고려해 이를 배제하고도 명확한 판단을 내릴  있는 ‘직관적 디자인 살리는   바람직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대선 역사상 최초의 재검표, 그 결과는

미국 정치 역사상 전무후무헀던 사건이었기에 투표가 끝나고도 한동안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효표로 처리된 1 9 유권자의 상당수는 "내가 찍고 싶은 후보에게 표를 찍을  있는 정당한 권리를 도둑맞았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표들의 상당수는 헷갈리는 투표용지 때문에 고어를 찍으려다 뷰 캐넌을 찍어  군데에 기표를  무효로 처리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기표 용지에 문제가 있어 고어 후보 대신  캐넌에게 기표했다고 주장하는 플로리다  민주당 지지자들  3명도 자신들이 유권자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했다며 법률소송을 제기했다(8일).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표 흑인 민권단체인 전미 흑인 연합회(NAACP) 이번 플로리다주 선거와 관련해 흑인  소수계 유권자들이 헷갈리는 기표용지 때문에 제대로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다며 개표 결과에 대한 소송을 연방과  법원에 각각 제기하기도 했다.     


특히 당시 플로리다의 주지사가 부시 후보의 친동생인  부시였던 터라 각종 정치적 음모론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결국 미국 연방 법원은 부시를 당선자로 최종 선고했다. 아직까지도  비치 투표용지와 관련해당 디자인엔 교활한 음모가 담겼다는 의견과 유권자가   꼼꼼하게 확인했으면 실수를 줄일  있었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이번 사건은 사용자를 고려하지 않은 디자인이 국민의 권리를 침해할  있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있다는 경각심을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일깨워준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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