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캐, 본캐가 되다

나의 이직 이야기

by 수풀사이로

이 집을 찾고 고치기 시작했을 때, 가능하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지쳤고, 에너지가 없었다. 일을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는데, 막상 회사를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걱정은 일이 아니라 돈이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면 수입이 ‘0’이 되니 뭔가 다른 수입원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집을 고쳐 농어촌 민박 같은 걸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혹시 모르니 농어촌 민박 시설기준을 확인하고, 허가를 받을 수 있는 크기의 정화조를 설치했다. 여차하면 때려치우고 내려가 농어촌민박을 할 작정이었다.


공사를 마치고 처음 맞은 계절은 봄이었다. 민박은커녕, 나 하나 편히 머물 공간으로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름에는 주방이 물바다가 되고, 돌담이 무너지기도 했다. 가을에는 여름 내 키워낸 작물들을 수확하고 월동준비를 하느라 혼을 쏙 뺐다. 그런데 육체노동을 그렇게 하는데도 오히려 점점 충전되는 기분이었다. 주말마다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새로운 에너지가 되고, 마음도 더 단단해졌다. 덕분인지 이 무렵 회사에서 승진도 했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었다. 그때부턴 이상하게 서울로 돌아가는 일요일 밤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설레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일이 싫어진 게 아니라, 일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지쳐있었을 뿐이라는 걸.


어느 날, 인테리어 앱의 에디터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온라인 집들이라는 코너에 사진과 글로 우리 집을 소개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종종 이용하던 앱이기도 하고 집에 대한 콘텐츠를 만든다니 조금 신나기도 해서, 단번에 수락했다. 그렇게 선뜻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강력한 야근 행진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야근을 마친 늦은 밤에, 꾸벅꾸벅 졸면서 사진을 고르고 글을 썼다. 안 하면 안 했지 대충이 안 되는 성격이라, 매일 다가오는 마감에 마음을 졸이며 한 자 한 자 적었다.


드디어 졸린 눈을 비비며 쓴 온라인 집들이가 발행되었다. 핸드폰이 계속 울렸다. 누군가가 좋아요를 눌렀고, 누군가가 댓글을 남겼다는 알람들이었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어서 깜짝 놀랐다. 자신만의 공간을 찾고 만들어가기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정말 많았다. 사람들이 보낸 메시지와 댓글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나 이런 일을 하고 싶어!

그런 생각을 하며 이력서 파일을 껐다 켰다 할 때였다. 며칠 후 거짓말처럼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얼마 전 내가 온라인 집들이를 발행한 회사에서 이커머스 관련 포지션을 채용한다는 거였다. '이건 운명이니까 무조건 지원해야지.' 하는 생각은 의외로 잠깐이었다. 10년 가까이 패션 MD로 일하던 내가,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회사보다 직책도, 맡고 있는 팀의 규모도 더 작아지는 포지션이었다.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첫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올해 5월, 시골에 자리 잡은지 딱 1년이 되는 달. 나는 새로운 분야, 새로운 회사로 첫 출근을 했다.


회사에서는 이름 대신 ‘수풀님’으로 불린다. 우리 회사는 직급이나 본명 대신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기 때문이다. 입사 전, 닉네임을 정해 회신해 달라는 메일을 앞에 두고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회사에서 닉네임이라니. 어떤 이름을 붙여도 불릴 때마다 어색할 것 같았다. 그럴 싸한 단어를 한참 늘어놓다가 결국 시골집에 붙인 이름, ‘수풀사이로’의 앞글자를 따서 ‘수풀’이라고 정했다. 시골살이를 나누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 모두 나를 수풀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조금은 덜 간지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풀사이로라는 나의 부캐가 본캐로 등극하는 순간 같았다.


이직을 하고 7개월이 훌쩍 지났다. 새로운 일은 재밌지만 힘들다. 가끔은 익숙하고 확신에 차 있던 예전의 나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당분간 농어촌 민박은 안 하지 싶다. 시골집 정화조는 그냥 넉넉하게 쓰는 걸로!




+) 그때 적었던 온라인 집들이

https://ohou.se/projects/39336/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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