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듯

by Lume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문득 글감이 떠오른다.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며 이런저런 생각이 흐르기 시작한다. 방금 전에 겪은 일, 기억하기 위해 마음에 담아둔 것들, 오래된 기억 속에 가라앉아있는 기억. 정신을 차려보니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빠듯해 걸음을 재촉한다. 재촉하는 걸음과는 별개로 생각은 여전히 제멋대로 풀풀 거리며 떠다닌다. 다만 조금은 피상적이고 늘상 떠오르는 것들이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떠올랐던 것들은 슬며시 사라진다. 몇 시간 후, 일을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서면 조금 전 생각이 흩어졌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글에 대한 생각에 다시 사로잡힌다. 그렇게 다시금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생각의 흐름 속으로 푹 빠져든다.


발걸음은 언제나 나를 같은 곳으로 데려가지만 제멋대로 떠오르는 생각과 기억은 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이끈다. 끝도 없이 떠오른 생각을 한 아름 안고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쓰려고 했던 최초의 한 단어만 기억나고 꽉 막힌 파이프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도 흐르지도 않는다. 메모를 해두지 않아서일까? 메모를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메모에 남은 몇 글자, 몇 단어만이 화면에 둥둥 떠다닐 뿐 어떤 생각도, 글도 떠오르지 않는다.


첫 문장이 글 전체를 이끌어낸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 그럴듯한 문장을 만들어내 본다. 뒤이어 몇 줄이 쓰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 달가량 글을 쓰면서 이렇게 만들어낸 첫 문장이 끝까지 사용된 적은 거의 없었다. 며칠 전, 혹은 몇 시간 전에 떠올랐던, 글에 꼭 넣고 싶어서 이리저리 다듬어봤던 문장이 떠오른다. 그 문장을 시작으로 글이 써진다. 여러 토막들이 만들어지고 적절히 이어 붙인다. 이렇게 내 글은 항상 중간부터 써진다.


떠오른 것이 그대로 글로 만들어지면 좋겠다. 생각이 그대로 글로 옮겨지면 좋겠다.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화려하고 찬란한 풍경들과 생동감 넘치는 이야기들이 각자의 단어를 만나 제 자리를 찾아가면 좋겠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림을 그리듯 글이 써지면 좋겠다.


동시에 너무 큰 기대와 바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지도 않을 것만 같다. 남들은 수십 년에 걸쳐 깨지고 부러지고 갈고닦아 만든 능력을 고작 글 열 편 남짓 쓴 주제에 욕심내다니. 더군다나 그림이라니? 내 생애 가장 자신 없고 재능 없다고 여기는 것이 그림인데 말이다. 어쩌면 내 그림 실력만큼 글이 써져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쓴다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일까? 며칠 전 읽었던 소설에 확 몰입할 수 있게 만든 문장이 떠오른다. '양동이는 겁에 질린 듯 요동치다가 곧 잠잠해졌다.' 끼리릭. 소화전이 돌아가고 맹렬히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물줄기 아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연약한 양동이가 눈앞에 그려진다.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쓴 양동이는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 요란함도 잠시, 물을 받아내기 시작한 양동이는 금세 굳건해진다. 조금 전 두려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흔들림 없이 견고한 양동이 한 통이 그려진다. 작가는 이 문장을 어떻게 썼을까? 그림을 그리듯 글을 썼을까? 아니면 독자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글을 쓴 것일까? 둘은 같은 것일까?


그림에는 조예가 없지만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을 보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림을 보는 순간 그림에는 없던 것이 떠오른다. 빈 테이블이 놓여있지만 화려한 조명 아래 사람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듯하다. 있지도 않은 인물들이 보이는 듯하고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화가는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그 소설을 썼을까? 마음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일까? 아니면 창작과정 자체가 작가와 화가에게 감정을 일으킨 것일까? 작가와 작품을 떼어 구분할 수 있을까? 작가와 작품, 그리고 감정을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까?


오늘 아침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다. 운동을 마치고 6개 들이 생수를 품에 안고 익숙한 길을 걸어가던 때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소박한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골목의 끝엔 익숙하지 않은, 유달리 추웠던 봄을 견디고 긴 기다림 끝에 품에 안고 있던 꽃을 한 번에 틔워낸 벚나무 한 그루 있었다. 나도 모르게 느껴진 편안함, 낯설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잠시,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건조함은 글뿐만 아니라 내 일상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해결해야 할 숙제였다. 특유의 무심함. 이렇듯 저렇듯 나와는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 일들. 반복되는 일상에 맞춰 하기로 마음먹은 것들을 반복하는 일상.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라는 오랜 착각으로 살아온 나날들. 사람은 하루아침에 메마르지 않을 테다. 그동안 외면해 왔던 것들이 내 가슴을 떠나 그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감정을 흠뻑 빨아들이는 것이 두렵다. 익숙한 메마름에서 벗어나, 이미 잊어버려 낯선 것이 내 심장의 한가운데부터 차오르는 감각을 나는 견디기 힘들다. 익숙하게 놓아버리면 편해질까?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드러내는 것이 이토록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오랜 시간 동안 감정 자체를 외면해 왔을 테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그럼에도 오늘은 생각이 아닌 감정에 잠겨보기로 한다. 감정이 흘러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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