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라는 열병

by Lume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내겐 너무나 어렵다. 옷 같은 물건인 경우에는 그나마 쉽지만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점점 어려워진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대상이 이성이다. 남들에겐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내게는 그렇다. 상대방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것이 내겐 사랑고백처럼 느껴진다. 그 한 마디에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게 느껴진다.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순한 칭찬을 하려 해도 예쁘다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안 그래도 주목을 받으면 쉽게 얼굴이 달아오르는데 조금이라도 부끄러운 말을 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런 나의 성향을 바꾸고 싶어도 쉽사리 시도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성향은 첫사랑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다. 중학교 2학년, 같은 반의 한 여학생이 항상 눈에 밟혔다. 4월이 되어 처음으로 자리를 바꾸던 날, 담임 선생님은 같이 앉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반 홈페이지에 비밀로 글을 올리라고 하셨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그 아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켰고 반 홈페이지에 들어가 가장 먼저 글을 남겼다. 그 아이와 짝을 하고 싶다고. 스스로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곤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는 내 책상과 노트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낙서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첫 한 달은 귀엽다. 그다음 한 달은 바보.


지금 떠올려보면 그 아이는 여자는 남자의 고백을 기다려야 한다는 전통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 그 기회를 잡아야 했건만, 나는 부끄러움에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누군가 좋아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는 상황을 당시의 나는 견디지 못했다.


내게 지친 것일까? 방학이 지나자 그 아이는 내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아주 소심하고 조용하게 말하고 다녀서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그 아이를 좋아했던 한 사람. 옆자리에 앉고 싶어 집에 달려가 누구보다 빨리 글을 올렸던 한 사람. 좋아하는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친구들 뿐만 아니라 그 아이에게도 마음을 꽁꽁 숨겨온 한 사람. 그 아이도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지만 고백하지 못했던 한 사람에게만 가슴속 깊은 곳에 상처를 남겼다. 그 아픈 상처를 감싸며 나는 더욱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아이와 조금이라도 더 엮이기를 바랬다. 학교에서 조별활동을 하면 같은 조에 들어가기를 바랬고, 내 바로 옆에 서있을 땐 눈도 마주치지 못했으면서 체육시간이든 음악시간이든 그 아이가 저만치 앞에 서있는 경우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3학년이 되어 반배정을 받을 때에는 같은 반이기를 빌었고 같은 반에 그 아이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땐 나도 모르게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름이 같은 다른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내 마음을 숨겨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그 아이에게 더욱 다가갈 수 없었다. 처음 사랑에 빠졌지만 고백하지 못했던 것은 그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을 숨겨왔던 시간, 그 아이의 마음을 모른 척했던 시간, 외면했던 모든 것들이 내게 벽처럼 다가왔다. 애써 외면해 왔던 것들이 나를 둘러싸고 말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있겠느냐고. 이제 와서 속마음을 고백한 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깊숙이 숨어드는 것뿐이라고.


시간이 지나 졸업을 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 학교 복도에서조차 그 아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내 마음속 한켠에는 그 아이를 향한 복잡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그 아이가 어느 고등학교로 진학했는지조차 알지 못했지만,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문득 그 아이와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어도 나는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자책과 후회 때문일까? 지금도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가을방학이라는 2인조 밴드의 '첫사랑'이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음악을 들을 땐 가사에 집중해서 듣는데,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가사가 있다. '난생처음 비를 맞은 꽃의 표정.' 난생처음 비를 맞아본 꽃의 표정은 어떨까? 시원함과 행복함을 느낄까? 그럴 리 없다. 난생처음 맞아본 비가 첫사랑이라면, 그 비는 4월의 속살거리는 봄비도, 7월의 쏟아지는 장맛비도 아니다. 초여름의 5월, 잠깐 쏟아지는 소나기임에 분명하다. 갑자기 먹구름이 끼어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면 문득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내 영문도 모를 비가 쏟아져 머리부터 흠뻑 젖는다. 무언가 자신을 휩쓸고 지나가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뿐이다. 소나기는 금세 그치고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풀밭에 드러누워 따사로운 햇살에 젖은 몸을 말린다. 며칠이 지나면 왠지 모르게 심장이 아려온다. 영문모를 허전함을 안고 며칠을 보낸다. 이윽고 또다시 비가 내린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그리곤, 헤어 나올 수 없는 열병에 시달린다.


첫사랑은 내겐 너무 아픈 기억이다. 나는 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그때,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어 먼저 고백을 했더라면, 고백을 했더라면 달랐을까.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내가 겪은 사랑은 모두 첫사랑을 닮았다. 언제나 나 혼자 사랑에 빠졌고 새로운 사랑에 빠질 때마다 첫사랑을 반복했다. 혼자 속앓이를 하고, 자신 있게 나서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면서 알아주기만을 기다리며 내 고백이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할 것이라 두려워했다. 가끔 누군가 나에게 먼저 관심을 표현하는 경우에만 그 마음에 응답해 다가갈 수 있었다. 내 사랑은 언제나 한없는 기다림이었다.


분명 아픈 기억이지만, 아련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 마음이 뭔지도 몰랐던 순수했던 시절, 부끄러움에 압도되어 꼼짝도 못 하던 시절, 말 한마디 떼는 것이 어려워 속앓이를 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내가 되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첫사랑을 반복했고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준 고마운 인연이 있어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다. 여전히 부끄러움을 못 견뎌하지만 부끄러움이 나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열도 조금 내린 것 같다. 저질러볼 행동 리스트에 고백을 추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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