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하지 않아요. 정말로요.
가끔 팔꿈치 안쪽에 두꺼운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다니기에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헌혈을 했다고 하면 보통 놀란다. 주변에서 헌혈을 하는 사람을 보기 어려운가 보다. 반응도 제각각인데 평소에 헌혈을 접할 기회가 전혀 없어서 놀라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다. 간혹 고맙게도 멋지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걸 뭐 하러 해서 고생하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헌혈을 하는데 딱히 큰 의미를 두진 않는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나는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니 그냥 할 뿐이다.
무섭지 않냐는 질문도 종종 받곤 하는데 이 질문의 의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바늘에 찔리는 것이 무섭지 않냐는 것이다. 난 주삿바늘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혈관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은 채혈하면서 몇 번씩 찔리다가 주삿바늘을 무서워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내 경우에는 누가 봐도 혈관으로 보이는 것이 팔꿈치 안쪽을 가로지르고 있기에 잘못 찌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실습을 나온 간호사가 채혈을 한 적이 있는데 많이 긴장했었는지 내 팔을 보자마자 이런 혈관 너무 좋다는 고백을 받은 적도 있다. 다른 하나는 피를 뽑는 것 자체가 무섭지 않냐는 것이다. 만일에 잘못되면 어떡하냐는 건데, 건강한 성인이라면 헌혈 한 번에 뽑는 400ml 한 팩 정도는 여분의 혈액으로 가지고 있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뽑혀나간 여분의 혈액을 보충하기 위해서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는 말도 있는데 신뢰할 만한 정보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12시 반쯤 점심시간이 되기 직전에 헌혈을 하러 갔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내가 다니는 헌혈카페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자주 바뀐다. 그날도 처음 보는 간호사가 있었다. 젊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티가 나는 분이었다. 그렇다고 일이 서툴고 쩔쩔매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간호사들에게 자신이 일을 잘 하고 있는지 확인하면서 일을 배우고 계셨다. 무엇보다도 밝고 활기차보였다. 특유의 밝은 모습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듯 한 목소리로 헌혈자들을 대하셨다. 목소리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분이었다. 성함과 혈액형 한 번만 더 확인할게요~ 잠시 따끔합니다~ 따끔~ 잘 참으셨구요~ 혈액 잘 나오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실게요~ 같은 말을 맑고 귀엽게 하셨고 나도 그 분위기에 기분 좋고 편안하게 헌혈을 마쳤다.
지혈을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그 간호사분이 나를 잠시 붙잡으셨다. 반창고에 피가 많이 고여서 교체해 주겠다고 하셨다. 평소랑 별 차이는 없어 보였지만 이미 반창고를 교체하고 계셨다. 그런데 반창고를 조금 세게 떼셨는지 바늘 자국에서 피가 방울지듯 새어 나왔다. 늘상 있는 일인 듯 새어 나온 아무렇지 않게 피를 닦아내시고는 새로 반창고를 붙여주셨다. 휴게실에 앉아서 충분히 쉬다 가세요~ 하셨고 늘 그렇듯 휴게실에 앉아 팔꿈치 안쪽에 약간의 관심만을 둔 채 쉬면서 책을 읽었다.
밥도 먹고 왔으니 헌혈을 한 후에는 스터디카페에 가서 공부를 할 계획이었다. 책과 노트북이 들어 묵직한 가방을 들쳐 메는데 왼쪽 팔꿈치 안쪽이 따끔했다. 항상 헌혈할 때 바늘을 찌르는 곳이었다. 평소 헌혈을 하고 느껴본 적 없는 통증이었지만 딱히 아프지는 않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스터디카페까지 가는 동안에 낯선 통증이 팔 안쪽을 감싸고 있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카페에 들어가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낮 시간의 스터디카페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내가 자주 앉는 자리는 비어있었다. 얼른 내가 좋아하는 자리로 가 가방을 내려놓고 입고 있던 겉옷을 벗었다.
세상에, 왼팔 전체가 피에 젖어있었다. 나도 모르게 어억 하는 신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내가 오기 전부터 공부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내가 낸 소리에 나를 돌아보진 않았다. 돌아봤더라면... 끔찍했을 것 같다. 당시에 지하철 역에서 칼부림 사건이 일어나 분위기가 흉흉하던 시기였고 누군가 팔 한쪽이 피에 젖은 내 모습을 본다면... 뒤에 무슨 비명을 듣게 될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일단 팔을 가리기 위해 방금 벗었던 겉옷부터 다시 입었다. 그리고는 당장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어디로 가야 가장 빠르게 조치를 받을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근처에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을 떠올렸고 거기까지 가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생각했다. 아차, 그 병원은 몇 년 전에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다른 병원은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쯤 가야 한다.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 이 상태로 갈 수 있을까? 다른 선택지는 없나? 헌혈 후 문제가 생기면 가까운 헌혈카페에 방문하라는 헌혈 후에 오는 안전문자가 떠올랐다. 즉시 좀 전의 헌혈카페로 향했다. 지혈은 스터디카페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하고 있었다. 당장 붕대는 없기에 팔을 펴고 팔꿈치 안쪽을 꽉 누르는 수 밖에는 없었다. 걷기 시작하니 조금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참, 지혈을 할 땐 출혈 부위를 심장보다 높게 들어야지. 그래서 왼팔을 머리 위로 들고 오른손으로는 왼팔 팔꿈치를 지혈하면서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헌혈카페로 향했다. 뛰고 싶었지만 피를 흘려 저혈압인 상태에서 심박이 높아졌다간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뛰지도 걸음을 재촉하지도 못했다. 항상 다니는 길인데 그날따라 멀게만 느껴졌다.
헌혈카페에 가기 위해서는 큰길을 건너야 했다. 왼 팔을 높이 들고 초록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정확히는 왼 팔을 머리 위로 들고 왼쪽 팔꿈치 안쪽을 오른손으로 꽉 잡은 채 초록불이 켜지기만을 기다렸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내가 그냥 이상한 자세로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 것으로 보일 테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렇다고 겉옷을 벗고 내 팔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 최대한 차도에 가까이 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섰다. 택시가 지나갈 때마다 내 앞에 서지 않기를 간절히 바랬다. 기다리던 초록불이 켜지자 누구보다 빠르게 길을 건넜다. 역시나 왼 팔을 높이 든 채로 말이다. 요새는 5살 꼬마도 횡단보도를 건널 때 팔을 들지 않는 것 같은데 서른이 넘어 팔을 높이 들고 길을 건너니 기분이 묘했다. 이 상황이 어이없어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내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은가 보다 생각했다.
헌혈카페는 몇십 년은 족히 지난 낡은 건물의 3층에 있었다.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내가 그날 오전의 마지막 헌혈자라는 것이 떠올랐다. 내가 나간 후 헌혈카페는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 헌혈카페는 두꺼운 철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문을 두들겨보았지만 안쪽까지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반응은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헌혈카페 반대편에는 구직 사무소가 있었다. 당시에 너무 경황이 없어 옆에 있는 사무실에서 누군가 나온다면 내 상황을 차분히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점심시간이어서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음성만이 반복됐다. 시간을 봤다. 1시 45분. 점심시간이 끝나기까지 15분이 남았다. 또다시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장은 건물 바로 앞이다.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가는 것이 나을까? 병원에 가면 어떤 조치를 받을 수 있을까? 비용이 나올까? 하지만 왼 팔을 높이 들고 버스에 올라 몸을 흔들며 세 정거장을 갈 생각을 하니 까마득했다. 결국 나는 어떻게 할지 생각하느라 지나간 1분을 제외한 14분을 헌혈카페 문 앞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살면서 그렇게 긴 14분은 손에 꼽을 것이다. 기껏해야 바늘자국에서 피가 흘러나왔던 것이니 지혈은 이미 되고도 남았다. 딱히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정확한 조치를 받기 위해 기다렸다. 문 앞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그 누구도 내가 있는 복도를 지나가지 않기를 바랬다. 계단을 흘끔거리며 지나가는 사람이 없기를 정말 간절히 바랬다. 그러면서 복도에 앉아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지은 지 수십 년이 지나 낡은 건물의 3층, 건너편에는 구직 사무소가 있는 복도에서 페인트가 벗겨지기 시작한 철문에 기대어 피에 젖은 왼 팔을 부여잡고 앉아있었다. 조명만 어두웠으면 누와르 영화의 엔딩 장면으로 써도 손색이 없으리라. 물론 나는 칼이 아닌 주삿바늘에 찔렸고, 패배의 비참함에 좌절한 것이 아닌 빨리 점심시간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않기만을 바랬다.
등 뒤에서 덜컹이는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고 나온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분은 30분 전, 내가 피에 젖은 팔을 볼 때와 같은 종류의 신음소리를 내셨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소리쳤다. 지혈이 잘못된 것 같다는 내 말에 그러면 문을 두드리셨어야죠!라고 하셨다. 이미 충분히 두드렸는데요? 하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다급하게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 하셨다.
바로 헌혈용 의자에 누워 혈압부터 쟀다. 기계로 재지 않고 수동으로 직접, 정확하게 재셨다. 한 번으로는 안심이 안되셨는지 한번 더 재셨다. 옷은 찬물로 한번 헹구고 세탁하면 괜찮을 것 같다고는 하셨지만 말끝을 흐리셨다. 그제야 내가 흰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잠시 쉬는 동안 찬물로 헹궈주겠다 하셨다. 어차피 버리게 될 것 같아서 괜찮다고 했지만 너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내 앞에 서 계셨다. 딱히 누구 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피에 젖은 옷을 입고 돌아가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 드렸다. 오늘은 꼭 쉬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당부를 하시고 내가 자취를 한다고 하니 4시간 후에 확인전화를 하겠다고 하셨다. 그럼 다 된 건가요? 하는 내 질문에 충분히 쉬고 돌아가면 된다 하셨다. 앞서 겪은 일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였다. 실제로 한 것은 혈압을 잰 것 말고는 없다시피 했다. 그럼 난 왜 여기까지 오는데 그 고생을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왼 팔은 차갑고 축축했다.
이런 일을 겪고 난 후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헌혈을 하고 있고 매우 건강하다. 지혈이 잘못돼서 팔 한쪽이 온통 피에 젖을 만큼 피를 흘리더라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른 통증이 느껴지면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겨울만 되면 수혈용 혈액이 부족하다고 2주에 한 번씩 헌혈 독려 문자가 온다. 앞으로도 헌혈을 꾸준히 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