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하지만 즐겁다

by Lume

글쓰기 모임을 하나 하고 있다. 토요일 저녁에 모여서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시작한 지 4달쯤 지나는 동안 일정이 있어 모임시간에 빠진 적은 있어도 글을 빼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꾸준히 쓰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말을 항상 듣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빼먹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결국 여러 일이 겹치면서 지난주에 글을 쓰지 못했다. 요즘 들어 그동안 주로 쓰던 자기 탐색에 대한 글쓰기를 그만두기로 하면서 뭘 써야 할지 조금 막막한 심정이었다.


사실 지난주 목요일에 감사를 주제로 글을 한 편 썼었다. 전부터 감사에 대한 글을 써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충분히 쓸만한 소재가 모였다고 생각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웬걸 정말 글이 안 써졌다. 어떻게든 쓰고 마무리를 짓기 위해 전체적으로 내용을 훑어보는데 내가 읽어도 정말 지루하고 재미가 없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브런치에서 내 글을 우연히 읽는 분들이야 재미가 없으면 그냥 안 읽으면 될 테지만, 같이 모임을 하는 분들이 이 못난 글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살짝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글을 전체적으로 수정하려니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상했다. 버스에서 생각할 땐 제법 그럴듯했는데. 글로 써내니 정말 억지스러웠다. 의욕이 꺾여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토요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하루쯤 미뤄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금요일도 예상치 못하게 일정이 바뀌면서 글을 쓸 시간이 없었다. 모임 당일이 돼서야 좋은 소재가 떠올랐다. 지난주부터 학교에서 축제를 하고 있는데 축제 부스에서 책갈피 하나를 충동구매했다. 고작 몇 천 원 하는 책갈피에 충동구매라는 말을 붙여도 되나 싶다만 그렇게 길거리를 지나가다 사고 싶은 물건이 눈에 띄는 경우는 내겐 몇 년에 한 번 있는 정말 드문 일이다. 작년부터 책갈피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올해 산 책갈피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때의 즐거운 마음에 대해 쓰려했었다. 하지만 이미 예상하듯 새로 산 네잎클로버 모양의 책갈피는 글의 소재가 되지 못했다.


퇴근을 1시간 정도 남긴 시점에 학교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같이 학회에 가자고 했다. 학회 일정은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내가 일을 마치고 학회에 바로 간다 하더라도 2시간밖에 참여할 수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으나 같이 가자고 부추기는 사람이 있으니 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 동기도 알바가 끝나고 바로 갈 예정인데 나와 도착하는 시간이 비슷했다. 둘이 처지도 비슷하고 마지막 2시간 동안 이어지는 컨퍼런스의 주제에 전부터 관심이 있기도 해서 짧게라도 가보기로 했다.


이 친구 얘기를 잠깐 하자면 나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궁금하면 일단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고 고민할바에 일단 들이밀어보는 성격이다. 뭐든지 다 해보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어디는 참여한다. 나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바쁘게 사는 것 정도가 있는데 바쁘게 사는 방식이 또 정반대이다. 알바를 많이 하고 있는데 나라면 한 군데에서만 일을 하고 근무시간을 길게 할 텐데 이 친구는 여러 알바를 동시에 한다. 나라면 정신없을 것 같은데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내게 부족한 적극성을 많이 가지고 있기에 작년부터 종종 행동을 보고 배우려 하곤 했다.


학회에 가는 건 처음이어서 어떤 분위기일지 몰라 궁금한 마음을 안고 두리번거리며 살짝 긴장도 한 상태로 들어갔다. 한창 발표가 진행 중이었다. 진행 중인 발표는 거의 막바지였기에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마지막 컨퍼런스는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기에 주변 분위기를 둘러봤다. 내 상상 속에 학회는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엄중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훨씬 더 부드럽고 밝은 분위기였고 발표가 끝나고 질문시간이 되자 각자 궁금한 것들을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게 물었다. 오가는 대화 속에서 모두의 진지함이 묻어났고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다렸던 컨퍼런스가 시작되었고 흠뻑 빠져서 듣기 시작했다. (컨퍼런스 주제는 더닝-크루거 현상이었는데,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빈 수레가 요란하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관심 있는 분은 GPT의 도움을 받아보시기를.) 여러 강연자들이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각자의 연구를 소개했다. 모두 자신감에 차 자신의 연구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 어떻게 연구를 설계했는지 설명했고 모은 데이터를 분석해 얻은 결과를 토대로 설득력 있는 논의와 해석을 펼쳤다. 평소 학교에서 듣던 수업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살아있는 연구가 무엇인지 체감할 수 있었다. 또 학문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지, 어떻게 해결책을 만들어내는지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몰입해서 강연을 듣고 나니 나도 궁금한 것이 생겼다. 질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자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운 마음이 든다. 강연은 몰입해서 들었으나 나는 아직 그 학회에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다른 연고가 있는 사람도 없었고 처음 가본 학회였기에 여전히 눈치를 보고만 있었다. 질문 시간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질문을 들어보는데 내가 생각했던 질문과는 전혀 다른 결의 질문만 이어졌고 조금 더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다음번 학회땐 궁금한 것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질문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으로 마칠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 컨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정말 참여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학회장님이 폐회사를 하며 저녁식사에 참여하실 분들은 근처 감자탕집으로 오시면 된다고 하셨다. 우리는 뒤풀이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질문을 하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왠지 모를 낮설음을 느끼고 있었던 나는 그 뒤풀이에 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는 교수님이라도 계셨다면 인사도 할 겸 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날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찾아 가방을 뒤지고 있는데 같이 간 동기가 이런 말을 했다. 공짜 밥을 안 먹어?


으음? 처음엔 살짝 당황했다. 공짜인 건 맞는데 내 자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기는 그런 게 어딨냐며 가서 먹으면 그만 아니냐며 배고프니까 얼른 가자고 나를 보챘다. 이게 맞나 싶으면서도 아닐 건 또 뭔가 싶었다. 나도 분명히 학회에 참여했고 식당 예약도 넉넉하게 했다고 하니 가서 밥 한 끼 먹는 게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그냥 내가 서툴고 민망해서 그런 거지 문제 될 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얘랑 같이 있으니 행동도 보고 배울 겸 나도 가서 공짜 밥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자탕집에선 학회에서 스태프로 일하던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에게 몇 명이서 왔는지 물으시길래 두 명이라고 답했다. 둘이서 오는 경우는 드물었나 보다. 조금 당황하시더니 일단 안쪽에 앉으라 하시며 혹시나 자리가 부족하면 다른 분들과 같이 앉아야 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하긴 감자탕집에 2인석이 있기는 어렵겠지 생각하며 일단 자리를 잡았다. 꽤나 기다렸는데 자리가 부족할 일은 없어 보였고 우리는 그대로 감자탕 4인분을 둘이서 해치웠다. 심지어 옆 테이블엔 우리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사람이 오지 않았는데 저렇게 비워둘 거면 우리가 더 갖다 먹을까 하고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좀 더 뻔뻔해져도 괜찮을지 눈치를 보고 있었는데 직원분이 오시더니 테이블을 치워버리셨다. 눈독을 들이지 않았으면 모를까 어쩐지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우리 둘 다 이 상황을 어이없어했지만 충분히 푸짐하게 공짜 밥을 얻어먹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니 시간이 늦어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기는 글렀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뭐 어떡하랴, 학회도 재미있었고 밥도 맛있었는데. 이렇게 핑계를 남기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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