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self)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수많은 대답이 나올 수 있다. 나의 신체적 특징으로 대답할 수도 있고 나의 성격으로 답할 수도 있다. 나의 직업이나 역할 등 관계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도 있다. 어떤 측면에서 대답하든 상관없다. 모든 대답을 하나로 묶으면 자기가 된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 자기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아래의 질문에 답하면서 자기(self)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원하는 만큼 길고 많이 답해도 좋다.
- 나는 ____________ 한 사람이다.
- 나는 ____________ 하지 않는 사람이다.
- 내게서 마음에 드는 부분은 ______________이다.
- 내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______________이다.
- 나는 ____________ 를 잘하는 사람이다.
- 나는 ____________ 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 다른 사람들이 ____________ 하기에 나는 ____________ 한다.
위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낸 질문들이다. 각자 나름대로의 답을 했을 것이다. 떠올린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기개념이라고 한다. 평소 자기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그 내용이 분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행동의 이유를 잘 찾아낼 수 있다.
자기개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짚어야 하는 것은 자기개념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가이다. 자기개념이 경직되어 있는 사람은 스스로가 생각한 자신의 틀 안에 자기를 끼워 넣는 사람이 된다. 이를 자기개념화라고 부른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나 자신인 자기가 먼저 존재하고 그에 대한 생각이나 평가로 인해 자기개념이 생겨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개념이 경직된 사람들은 본래의 나 자신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스스로 정한 자기개념이 자기를 대신해 버린다. 주객이 전도되어버린다. 자기개념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자기개념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긍정적인 자기개념이 실제 자기와 비교해 허황되고 비대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착한 사람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은 자신을 곤경에 빠뜨려가면서 다른 사람을 돕기도 한다.
그렇기에 좋은 자기개념이란 나를 아주 정확히 알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현재의 내가 경험하고 느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 자신을 정확히 관찰하는 것에 가깝다. ACT(수용전념치료)에서는 세 가지 자기인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순서대로 개념화된 자기, 지속적인 자기인식으로서의 자기, 관찰하는 자기가 있고 뒤로 갈수록 본질적인 자기에 가까워진다.
첫째는 개념화된 자기이다. 이름에서 느낌이 올지 모르겠다. 개념화된 자기란 자기개념화에 의해 만들어진 자기이다. 언어적으로 정의되어 있으며 평가적 요소로 가득 찬 자기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개념화된 자기를 갖고 살아간다. 그럴 만도 한 게 경쟁적이고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생각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 쉽다. MBTI가 그렇게 유행했던 것을 보면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을 분명하게 정의해 주는 것을 얼마나 원하는지를 알 수 있다. 외부에서 오는 확실함은 내면에서 나오는 불확실함을 상쇄시켜 주며 안정감을 줄 수 있다. 다만 그 안정감에 익숙해지고 의지하게 되면 점차 경직되고 개념화된 자기에 지배당할 수 있다.
둘째는 지속적인 자각과정으로서의 자기이다. 지속적인 자각이란 자신의 모습과 상태를 지속적으로 바라보고 유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지속적인 자각과정으로서의 자기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자신이 현재 느끼는 감정, 떠오르는 생각, 해야 하는 행동, 내가 처한 환경,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며 현재적이고 유연하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잘 자각하지 못한다. 잔뜩 화가 난 사람에게 화내지 말라고 말해도 정작 본인은 화난 게 아니라 한다. 실망감과 속상함을 구분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면 벌컥 화를 내버린다. 슬픈 감정이 들어도 그를 품어주지 못하고 불편해하며 다 쓸모없다며 덮어버리려 한다. 지속적인 자각과정으로서의 자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서에 적절히 접촉할 수 있어야 하며 정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과도한 방어가 없어야 가능하다.
마지막은 관찰하는 자기이다. 관찰하는 자기는 가장 중요한 자기이면서 우리가 인식하기 어려운 자기이다. 관찰하는 자기는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관찰하는 자기는 경험으로만 인식이 가능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 또한 관찰하는 자기를 경험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비유를 들어보려 한다. 상상하며 읽으면 관찰하는 자기를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세 가지 자기(self)는 무대에 비유할 수 있다. 무대 위에 배우들이 올라와 각자의 연기와 노래와 춤을 선보인다. 어떤 배우는 즐거워 보이고 어떤 배우는 슬픔에 가득 차있고 어떤 배우는 배신감에 분노를 이기지 못한다. 이때 스포트라이트가 주인공의 모습을 비춘다. 주인공의 모습은 개념화된 자기이다. 느끼는 감정과 생각, 행동 그 자체이다. 그들은 감정과 분리될 수 없으며 생각과 융합되어 있다. 지속적인 자각과정으로서의 자기는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을 감상하는 관객이다. 관객은 배우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그들의 감정을 이해한다. 여러 배우들을 볼 수 있고 배우들의 연기에 이입하되 배우 그 자체가 되진 않는다. 생각과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는 있지만 그 과정 자체 또한 생각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렇다면 관찰하는 자기는 무엇일까? 관찰하는 자기는 무대 그 자체다. 관찰하는 자기 안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서로 얽히고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런 감정을 자각하는 관객들도 존재한다. 이 모든 것을 품고서 단단하게 견디며 서있는 것이 무대이며 관찰하는 자기이다.
우리가 관찰하는 자기를 인식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대는 모든 일이 일어나는 배경으로서 존재하고 그 무대 자체가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 그저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공간을 제공할 뿐이다. 무대 위에 무대가 올라갈 수 없다. 무대는 무대 자신을 볼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무대 자체가 스스로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 외에 무대를 인식할 방법이 없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얘기해보자. 생각은 뇌에서 이루어진다. 위가 음식을 소화하는 것과 동일하다. 소화는 위의 기능일 뿐인 것처럼 생각은 뇌의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이쯤 되면 생각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조망하는 것 또한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뇌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그 생각을 조망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어떤 공간에 가깝다. 생각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나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생각이 이루어지는 어떤 공간이 배경처럼 존재함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만이 가능하다.
관찰하는 자기가 어떻게 느껴지는가? 앞서 개념화된 자기에 익숙해지는 이유로 나는 불확실함을 꼽았다. 관찰하는 자기는 어떠한가? 불확실하게 느껴지는가? 관찰하는 자기가 이해되는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이 일어나는 거대한 무대로서의 자기가 불확실한 느낌을 주는지 묻는 것이다. 떠올릴 수만 있다면 관찰하는 자기로써 무대는 견고하게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단하게 지탱한다. 나는 관찰하는 자기에 접촉하려고 시도하면서 내 마음이 점차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강박적으로 매달리던 것들이 한낱 티끌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어와 생각으로는 접촉할 수 없는 관찰하는 자기를 인식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가장 대표적인 훈련이 마음챙김이다. 마음챙김은 심리학이 동양철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마음챙김은 경험적인 사건이 어느 순간 일어날 때, 그 사건에 융합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수용하고, 그를 의도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마음챙김은 ACT를 연재하면서 이야기한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