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가 나른해서

by Lume

자리에 앉은 지 10분도 되지 않아 독서모임에 나온 것을 후회했다. 모임에 나오지 않으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뭉개고 있을 것 같아 모임에 나왔지만 막상 나오니 나른하게 뭉개고 있을 침대가 그립다. 가져간 책을 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e북을 몇 페이지 읽었다. 그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중력을 잃어버렸다. 카페도 따뜻하니 웅크리고 앉아 잠시 졸음에 취해볼까 했지만 오늘따라 나른함이 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기는 싫지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타이핑하는 소리가 다른 회원들이 방해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혼자서 테이블을 옮긴다. 세미나룸을 나오니 카페는 소란스럽다. 룸만큼 따뜻하지도 않다. 다시 들어가고 싶었지만 다른 회원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아무 데나 앉아 노트북을 켠다. 살짝 도는 찬 공기가 정신을 깨우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떠들고 카운터도 부산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소란함이다. 이어폰을 귀에 꽂지만 음악은 틀지 않는다. 소란함을 또 다른 소란함으로 덮는 것은 사양이다.


독서모임에 나오기 시작한 지 3년이 넘어간다. 수험생활을 그만두고 과외를 시작하면서 함께 시작한 모임이다. 처음 모임에 나온 날에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담은 대중서를 가져와서 소개했다. 당시 자리에 있었던 10명 남짓한 사람들 중에 지금도 모임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모임장 형뿐이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달라지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느낀다는 것은 꽤나 미묘하다. 흘러간 시간과 함께 떠나가버린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아있을까? 깊은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요즘따라 아쉽게 느껴진다.


기록을 보니 그동안 대략 150권 정도 읽었다. 이만큼 읽었으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책을 읽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알 법도 한데 여전히 나는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고도 여전히 책을 읽고 있다. 물론 오늘은 읽기보다 쓰기가 더 좋지만 말이다. 남들은 책이 마음의 양식이라느니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느니 하는데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배우기는 하지만 그게 꼭 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게 익숙한 매체일 뿐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습관이 있다. 종종 대단하다는 말을 듣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폰이나 책이나 무언가를 본다는 똑같은 습관일 뿐이다. 가방을 앞으로 메면 옴짝달싹 못하는 지옥철이 아닌 이상 책을 펼칠 공간이 확보된다. 몇 페이지 읽다 보면 이 책을 지하철에서 가볍게 읽어도 될지, 조용한 곳에서 집중해서 읽어야 할지 느낌이 온다. 다음에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책을 꺼내거나 e북을 읽는다. 물론 나중에 읽겠다고 미뤄뒀다가 잊혀지거나 반납 기한이 다가와 읽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별 수 없는 일이다. 기회가 있다면 다시 읽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책을 꼭 완독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읽히는 만큼만 읽으면 그만이다. 영화나 드라마는 재미가 없으면 도중에 하차하면서 책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있는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책을 읽는데 방해가 된다고 본다. 재미없으면 그만 읽어도 된다. 남들은 다들 좋은 책이라는데 나는 전혀 읽히지 않는 책도 있다. 정말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면 언젠가 다시 읽을 기회가 올 거다. 그때 읽으면 그만이다. 그땐 어떻게 읽힐지 모르는 일이다. 1년에 50권 가까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책에서 무언가 얻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입맛대로 읽으면 그만이다.


나름 읽은 책이 쌓여서인지 모임에 나오면 회원들이 가져온 책 중에 한두 권은 읽어본 책인 경우가 많다. 운영진이기도 하고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한 마음에 책이 어땠는지 말을 걸어보기도 한다. 생각보다 읽은 대로 편하게 말을 하는 회원이 별로 없다. 책을 얼마 읽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 듯하다. 독서는 그런 게 아닌데 같은 생각을 하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문득 내가 질문을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난 질문을 조심스럽게 하는 편인데... 그냥 내가 어색해서 그런 거겠지?


대화 내용이 어떻든 누군가에게 말은 거는 내 모습은 3년 전을 떠올려보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내 사교성의 절반은 독서모임에서 키워진 듯하다. 읽고 생각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궁금한 점을 묻기도 하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인간관계는 다 필요 없다며 구석에 처박혀 공부만 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장족의 발전이다. 이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데서 오는 동질감도 즐겁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새롭다. 곰곰이 들어보면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모든 것을 납득할 필요 또한 없을 테다.


사람들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관계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의 규모가 큰 편이다 보니 넓고 얕은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았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는 있었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기 어렵다고 느꼈다. 자신의 생각이 분명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그들과 내 생각을 나누어보고 싶다. 회원들과 좀 더 개인적인 친분을 다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어쩌면 다른 모임을 찾을 필요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너무 오래 한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아까 책에 집중이 안되던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유라는 것은 참 독특하다. 어떤 일에 이유를 발견하는 순간에는 더할 나위 없이 옳다고 여겨지는데, 시간이 흐르고 다시 생각해 보면 그냥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것 같기도 하다. 문득 든 생각을 정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살아오면서 내린 결론 중에 이렇게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것이 얼마나 많을까? 그렇게 내려진 결정이 지금의 내 삶을 좌우하고 있다면 어떻게 자신의 삶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아무도 알 수 없으니, 그러니까 그게 인생이라고 결론짓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것일까? 나에 대해서도 이럴진대,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 후기를 나눌 시간이 다가온다. 오늘은 책을 한 장도 읽지 않았지만 전에 읽은 내용을 얘기하면 된다. 모임에 회의적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회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분명 아쉬운 생각은 금세 사라질게 분명하다. 어째서인지 혼자 있을 때 드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드는 생각보다 언제나 부정적이다.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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