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볕이 좋은 날에는 빨래를 한다.
뉴질랜드에 오면
볕 좋은 날 카페테라스에서 플랫화이트를 마시거나
공원에 나가 책을 읽으며 여유를 부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혹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파크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안다.
햇살이 좋은 날은
집안에서 살림하기에 최적의 날이라는 것을
돌아다녀봤자 얼굴에 기미만 늘어난다는 걸.
볕이 좋은 날은 아이들 등교 후
창문을 다 열어놓고 열심히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을 말리고 세탁기를 몇 번이고 돌려서
햇빛이 들이치는 장소 곳곳에
건조대와 행주 등등
이런저런 말릴 것들을 여기저기 널어둔다.
게으름을 피우는 순간 빨래 쓰나미를 맞이하게 되므로
아침부터 바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이곳 크라이스트처치의 날씨는 주로 햇빛이 쨍쨍하고,
바람이 많이 분다.
호주 브리즈번 도시의 바람도 이토록 향기로울까 싶도록
부드러운 솔바람이 불어오는 날이 있는가 하면,
남극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온몸이 시린 바람이 부는 날도 있다.
뉴질랜드에서 내가 살게 된 집은
단지를 이루고 있는 2층 타운하우스로
풀 퍼니쉬라는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래서 단독주택에 살아보는 로망이 살짝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계약을 했더랬다.
덕분에 비교적 편안하게 시작한 뉴질랜드 생활이지만,
감사함 가득한 이 집에
한 가지 없는 게 있으니,
바로 건조기 되시겠다.
여기는 볕과 바람이 좋아서 그런지
건조대에 빨래를 너는 집들이 아직 종종 보인다.
하지만 한국에서 10여년간 건조기를 쭉 사용했던 나에게
갑자기 건조기가 없어진 일상은 불편한 점이 꽤 많다.
일단 날씨에 따른 제약이 너무나 크다.
햇볕이 좋을 때만 빨래는 널 수 있기에,
해가 뜨면 그저 세탁기부터 돌리느라 바쁘다.
빨래의 각을 잡아 일일이 마당에 너는 것도 시간이 꽤 걸리고,
속옷은 야외에서 말릴 수가 없으니
실내건조대에 몇 날 며칠 걸려있어도
어째 축축시러운 기분이다.
특히 불편한 게 수건인데,
한국에서 쓰던 오래된 수건들을 들고 오니,
연식이 있는 수건들을 말리면 걸레처럼 너무 뻑뻑해져서
샤워 후 상쾌한 기분이 금세 사그라져버린다.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수건을 바리바리 싸왔건만
아무래도 빨리 마른다는 극세사 수건을 찾아봐야 될 것 같다.
또 이곳의 날씨는 쾌청하다가도 갑자기 사정없이 빗방울이 내리치는 때가 있다.
일기예보를 틈틈이 보면서 확인도 하고
집에 있어서 후다닥 대응이 가능하면 그나마 다행이나
외출했다가 들어오거나,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스콜이 지나가버리면
이렇게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빨래를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기인 겨울을 잘 나를 수 있을까 싶어
작은 사이즈의 건조기도 찾아보았지만.
살림을 늘리는 것도 부담이고
놓을 공간도 마땅치 않아
아마도 근처 빨래방을 애용하면서 지금처럼 살 것 같다.
그럼에도 이 집의 여러 장점들은 건조기의 부재를 상쇄하는데,
특히나 아이들은 처음 살아보는 이층 집을 무척 애정한다.
밤이면 2층에 옹기종기 모여 자는데,
마치 다락방에 숨어든 것 같은 포근함이 참 좋다.
며칠간의 비와 추위가 지나고,
여러모로 고단했던 어느 날 밤.
우리는 창문 너머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마주했다.
운 좋게도 2층 방 창문 앞으로 개기월식이 찾아온 것..!!
한국에서는 구름에 가리거나 새벽이라 번번이 놓쳤던 그 우주쇼를,
아이들과 함께 따뜻한 이불속에 누워 실시간 풀 영상으로 직관하는 행운을 누렸다.
예상치 못한 자연의 선물에
또 한동안 행복감을 느끼며,
아직은 많이 분주하고, 조금씩 불편한 점들이 있지만
뉴질랜드의 바람과 볕을,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천천히 온몸으로 배워가는 중이다.